■ 김병종의 시화기행 - (105) 이탈리아 미술의 후원자들
다빈치·미켈란젤로 등 천재의 탄생
조직적이고 확고한 지원이 뒷받침
대대손손 투자 아끼지 않은 메디치家
발가벗은 ‘神의 형상’ 허락한 교황도
예술가들의 창조력 못지 않은 능력
좋은 여행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한다. 동반자가 좋을 것, 가방이 가벼울 것, 돌아올 집이 있을 것. 여행하기 좋은 ‘때’에 대한 조건도 있다. 다리 떨리기 전, 가슴이 떨릴 때. 화가인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 우선순위가 바뀐다. ‘시야가 흐려지기 전에 떠날 것’이다.
시야가 흐려져서 색채가 뿌옇게 되고 형태가 흔들리기 전에 볼 것. 가슴이 떨리는지는 그다음 문제다. 다리도 싱싱하고 감동의 피와 살도 적당히 끓고 있을 때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나서 ‘색채론’을 썼던 한 남자가 떠오른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시각에 자신만만했던 것 같다. 10대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방대한 집필을 하고 83세에 눈을 감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다. 안경을 쓴 초상이나 사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타고난 좋은 시력의 소유자였던 듯싶다. 그는 서른일곱 살 때와 마흔한 살 때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고전 미술과 사랑에 빠졌고 돌아와 쓴 것이 바로 ‘색채론’이었다. 대개 한 지역 여행에서는 하나의 기억만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세기의 지성에게 이탈리아는 색채와 형태의 기억으로 남게 된 곳이었다. 자신의 나라에서는 체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이탈리아 기행’ 곳곳에서 거의 숭배에 가깝게 그 땅을 그려냈다.
색채론에서 그가 인식과 직관의 방법으로 제시한 원현상(urphanomen)이 물론 로마나 피렌체에서 만난 천재들의 작품들에서만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오히려 자연 현상에 대한 지각과 인식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색채에 대한 자각몽이 공중에서 일시에 후두두 떨어져 내리는 열매처럼 그의 지성을 흔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실험실을 떠나지 않고 ‘색채론’을 썼던 아이작 뉴턴의 근대 과학적 방법론들에 대해 다분히 적대적이었다. 뉴턴의 색채론이 물질세계와 자아의 완전한 분리, 즉 주관성과 직관적 해석을 철저히 배제한 채 색채 현상만을 과학적 도구에 의해 분석하는 비좁은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와서 쓴 괴테의 ‘색채론’은 실험실에서 쓴 뉴턴 색채학의 물리학적 입장뿐 아니라 심리학과 생리학, 철학, 심지어 시학과 신학까지 망라하면서 학제 간 이종 교배 혹은 유기적 총체성의 재료가 됐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와 예술과 학문과 역사가 분리되지 않은 채 ‘다른 하나’로 존재하는 이탈리아 전통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색채론은 그 자체가 나뉠 수 없는 ‘총체적 하나’이기도 했고 이것이 뉴턴의 색채론에 대해 갖게 된 상대적 우월감의 근거이기도 했을 것이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오늘 짚어보려 했던 것은 괴테나 뉴턴에 관한 것이 아니다. 괴테와 같은 대문호가 젊은 날 20개월의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나서 ‘색채론’뿐 아니라 ‘이탈리아 기행’이라는 대작을 시작했을 만큼 그 나라에는 확실히 학문의 원천 혹은 예술적 섬광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 향연 앞에서 세기의 지성도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어 경배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득 생각이 미치는 데가 있었다. 그 감동의 서사를 있게 한 배후 인물에 관한 것이었다. 누구였을까. 교회에 감히 벌거벗은 신(神)의 그림을 그리도록 최종 허용한 인물이 누구였을까. 산골 소년 다윗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벗은 몸의 청년으로 조각해도 좋다고 했을 뿐 아니라 카라라 석산 중 최고의 대리석을 제공한 그 인물이. 시골 출신의 혼외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원석(原石)을 조각가, 건축가,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지질학자, 천문학자, 요리사, 의사 그리고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라는 팔면체 다이아몬드로 빛나게 한 사람이. 무엇보다 살인자 카라바조의 그림을 성전에 걸게 한 사람이.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한없는 관용과 후원을 베푼 동행자에게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 여행이 깊어질수록 차츰 번쩍이는 발광체뿐 아니라 그 배후에서 빛을 내도록 조종한 보이지 않는 분투에 대해 관심을 지니게 됐다. 저 행성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깨고 함께 일어나며, 그러나 그들이 빛날 때 비켜서 있는 존재, 빛은커녕 때로는 기꺼이 그늘이 돼도 좋았던 ‘그들’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와 도나텔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카라바조라는 발광체에 매혹되고 감동하지만 이들이 빛을 낼 수 있게 도와준 메디치 가문과 교황 율리우스 2세, 보르게세 추기경에 대해서는 무심하거나 지식검색 정도의 차원에서 짚고 넘어갈 뿐이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의 예술가에 대한 조직적이고 확고하며 지속적인 후원이 없었던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어떻게 가능했겠으며 예술도시 피렌체의 아우라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겠는가.
비록 끝없는 갈등의 연속이었지만 결국엔 거장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비롯한 일군의 천재 작가 쪽에 서서 교회의 문을 예술을 향해 활짝 열었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아니고서는 온전히 그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모름지기 기업이나 교회가 예술가적 상상력과 한배를 타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내부적 힘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늘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예술적 비범함과 접속되지 않으면 힘을 잃고 만다는 것, 가장 창조적인 자만이 창조주의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는 것이라는 그 확신은 그러나 모험이었고 자초한 시련이기도 했다. 특히나 성경을 문자 세계의 밖으로까지 확산시키려는 시도는 수많은 의식의 규율과 부딪혀야만 했을 것이다. 중세의 칼 찬 기사처럼 신학적 규범들로 무장한 사제들과, 무모하고 가끔은 무질서하며 파괴적이기까지 한 화가와 조각가들의 중립지대에서 각각 서로 다른 쪽을 보고 있는 그들의 시선을 거둬 함께 영원 쪽으로 향하게 한 그 비범성은 어쩌면 예술가들의 창조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 또 하나의 재능 혹은 용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긴 이탈리아 여행 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떠오르는 상념 하나. 필자의 나라에도 메디치나 율리우스 2세가 있는 것일까.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술과 영성을 묶어보려 노심초사 애썼던 교회 쪽의 몇 사람이 떠오른다. 우선 한반도가 캄캄하던 시절에 프린스턴대와 예일대에서 신학과 철학을 하고 돌아와 대학 강단과 목회를 통해 신학의 기초를 세우고 한국 교회 선진화에 기여했던 전성천 박사가 생각난다. 문화 관련 정부 수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멀리 무등산 자락의 의재 허백련을 찾아가 다담(茶談)을 나눴을 만큼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이가 한국 미술과 한국 신학의 접목을 꿈꾼 사람이었다면 홍정길 목사는 시무하는 교회에 운보(전통화가 김기창의 호)홀이라는 전시장과 음악당을 세웠을 만큼 꿈을 현실의 지평 위에 옮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현실의 지평 위에 실현시켰을 뿐 아니라 활짝 꽃피운 사람이 오정현 목사다.
세상의 시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똑딱, 똑딱… “문화가 답이다”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유독 교회만은 빗장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결과로 예술과 영성이 만날 수 있다고 기대했던 잠재적 신자들을 소외시켜 버렸다. 죄악이고 말고다. 주지하다시피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근원이자 우주를 디자인하신 대예술가다. 그 빛을 받은 지상의 예술가 또한 영성과 조화된 창의력으로 영원에 대한 갈망을 가질 때 그가 다다른 결국은 창조주의 발꿈치일 수 있다.
논리상 교회가 창조주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예술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창조에 대항해 싸우는 아이러니가 된다.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몇몇 추기경이 떠도는 환쟁이, 각(刻)쟁이들을 신성한 성전에 불러들여 천상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주문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당시로는 그들의 날갯짓으로 저 멀리 별까지 날아보라고 한 것만큼이나 큰 모험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날개 대신 끌과 망치와 붓을 들고 맡겨진 소명을 다했고 그 결과로 그들이 만든 예술품들이 걸려 있는 교회나 미술관을 향해 오늘도 세상의 동서남북에서 발걸음들이 모여들고 있다. 창조주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미간을 찡그리셨을까. 아니라는 것쯤은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 메디치 가문은…
13∼17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가문. 금융업계를 지배한 후 정계 장악에 나섰고, 가문에서 4명의 교황(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비오 4세, 레오 11세·사진)을 배출했다.
메디치 가문이 오늘날에도 자주 언급되는 것은 대를 이어 예술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로렌초’(1449∼1492) 등은 성당을 지은 뒤 벽화를 주문하고, 산드로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등 예술가를 후원했다. 미술관을 설립하고 피사(Pisa) 대학의 개축에 힘쓰기도 했다.
메디치의 문화예술 후원에 대해 미술사학자 언스트 곰브리치 등은 “고리대금업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에 환원한 것이었다”고 봤다. 사회 전반의 적개심을 의식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예술 사랑이 유럽 문예부흥의 초석이 된 것은 사실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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