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싸구려의 힘│웬디 A 월러슨 지음│이종호 옮김│글항아리
18세기 중반 떠돌이 상인들이
값싼 상품 ‘소비자 혁명’촉발
공짜 증정품도 일상생활 침투
비누 1개 팔며 30개 경품까지
제3세계 근로자 노동 착취에
각종 폐기물로 환경오염 유발
“비워내는 삶이 인류에 보탬”
‘싸구려의 힘’은 ‘Crap: A History of Cheap Stuff in America’라는 원제에서 알 수 있듯 값싼 것들의 문화사다. 크랩(crap)의 사전적 의미는 ‘형편없는’ ‘쓰레기 같은’ 등인데 책에선 주변에 널린 ‘싸구려 잡동사니’를 폭넓게 지칭한다. 언뜻 가볍고 흥미로운 역사서처럼 보이지만 크랩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상당히 비판적이다. 미국 역사학자 웬디 A 월러슨은 ‘공짜 사은품’부터 각종 도구와 수집품까지 일상의 방대한 사례를 바탕으로 현대인들이 처한 물적·정신적 토대를 살피며 “피폐한 상품 세계가 인간의 정서 또한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저가품이 일상에 침투한 건 1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떠돌이 상인들은 짐 꾸러미에 값싸고 진귀한 물건들을 넣고 돌아다니며 ‘소비자 혁명’을 촉발했다. 소비자들은 이전과 달리 내구성이 떨어져도 저렴한 상품을 구매해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일회용품 문화’와 ‘보편적 저렴함의 시대’를 만든 행상인 군단은 1790년대에 상설 잡화점으로 편입됐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잡화점이 ‘원 달러 스토어’나 ‘다이소’ 같은 균일가 매장의 모태가 됐다는 점이다. 박리다매 전략으로 수익을 실현한 잡화점은 19세기 후반 훨씬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는 균일가 매장으로 변모했다. 1879년 뉴욕주에 문을 연 ‘5센트 매장’처럼 단기간에 수많은 점포를 거느린 체인으로 성장하는 사례도 줄을 이었다. 당시 유행한 ‘매장에 도둑이 들어 두 시간 동안 1달러어치나 훔쳐갔대요’라는 농담은 가격 후려치기로 낮은 품질을 가린 크랩에 대한 고객들의 환호를 대변했다. “거대 체인점들은 치밀한 상품 배치와 홍보 전략으로 ‘사냥의 스릴’을 자극했다. 싸구려의 풍요는 소비의 민주화를 이끌었지만, 조잡하고 열등한 재료로 만들어진 상품들은 건전한 구매 능력을 좌절시켰다.”
오늘날 흔히 보는 ‘공짜 증정품’ 역시 수백 년 전부터 유행이 시작됐다. 1850년대 최고의 비누 상인으로 알려진 히버드 로스는 비누 한 개를 팔 때마다 손수건·잡지·회중시계 등 30개에 달하는 경품을 제공했다. 심지어 철도역 근처 땅을 공짜로 준 적도 있었다. 이런 경품은 본 상품의 인기가 시들해질 때마다 판로를 뚫어줬다. 수많은 ‘공짜들’은 “지출이 마치 저축인 듯 가면을 쓴 채” 삶으로 침투했다. ‘공짜의 보편화’로 경품만 전문적으로 생산·공급하는 업체들까지 생길 정도였다. 20세기 들어 경품 전략은 한층 노골적으로 발전했다. ‘광고 판촉물’이라는 새로운 싸구려가 등장한 것이다. ‘구매해야 제공한다’는 조건이 붙은 기존 경품과 달리 광고 판촉물은 기업들이 100% 공짜로 뿌리는 상품이었다. “공짜 물건을 받을 때 우리는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상업의 세계를 광고하는 ‘홍보 요원’으로 전락한다.”
싸구려가 반드시 저렴한 물품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값이 비싸도 효용이 분명하지 않다면 크랩에 포함된다. 책은 각종 도구와 의료기기, 장식품 등도 ‘싸구려의 과잉’에 일조했다고 말한다. 감자 껍질깎이, 아스파라거스 전용 집게, 무려 112가지 기능을 한데 모은 스위스산 나이프 같은 도구들은 비교적 간단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휴대용 사우나나 블루투스 3D 전신 안마의자, 전기 의료기기 등은 ‘무기력증을 날려 없앤다’ 같은 기만적 광고에 비해 쓸모는 부족했다. 또 과시욕과 허세를 충족시키는 골동품과 장식품엔 흔히 ‘낭만적 서사’가 부여된다. 이를테면 ‘알프스 산맥 목동이 마을의 실존 인물을 모델로 만든 조각상’이라며 희소성을 강조하는 식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물건들조차 대부분은 잡화점의 잡동사니와 마찬가지로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남과 다른 안목’을 뽐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장식품을 선물로 주고받았지만, 대량생산된 공산품은 구매자를 ‘다른 모두와 똑같이 독특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들 크랩이 나쁜 것은 단순히 싸구려여서가 아니라 세상을 더 열악한 곳으로 퇴보시키기 때문이다. 박리다매를 위한 가격 후려치기는 광범위한 노동 착취를 낳았다. 잡동사니의 중심 생산지는 19세기 유럽에서 일본·홍콩·대만·중국 등으로 이동해왔는데, 제3세계 노동자들은 지금도 ‘가능한 한 낮은 임금’을 받고 크랩을 생산하고 있다. “그들의 노동이 더 좋은 물건이 아닌 싸구려를 만드는 데 투입된다는 것은 착취를 훨씬 더 타락시킨다.” 싸구려 물품은 또한 환경오염의 주범이다. 과거엔 크랩이 금속·목재·고무 등 용도를 변경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지곤 했으나 요즘은 ‘영구히 살아남지만 유용한 것으로는 변할 수 없는’ 합성물질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쓸모없는 폐기물은 바다를 떠돌고 땅에 묻히며 환경을 더럽힌다. 이쯤 되면 “크랩은 물질적 양태인 동시에 현대의 삶이 응축된 정신적 양태”라는 저자의 말에 수긍이 간다. 책은 단출하게 비워내는 삶이 개인의 ‘마음 평정’을 넘어 인류의 더 나은 미래에 보탬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싸구려에 둘러싸여 싸구려가 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544쪽, 2만5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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