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석호(潟湖) 위에 건설된 물의 도시 베니스는 비엔날레와 카니발 등 문화와 예술로 유명하지만, 과거엔 지중해를 제패했던 무역 강국이었다. 농경과 어업이 불가능했던 척박한 환경에서 베니스의 상인들은 이교도와 거래도 마다하지 않는 실리주의를 토대로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중개무역을 통해 지중해 해상대국을 건설한다. 이때 무역으로 축적한 막대한 부(富)는 금융과 교육·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된다.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와 개척정신으로 국부를 창출한 베니스의 상인들은, 국제 무역 질서의 급변 속에서 수출과 통상으로 먹고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우리를 둘러싼 통상 환경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만큼 불확실했다. 2016년 6월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에 이어, 11월에는 대서양 건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자체제가 흔들리고,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가 본격화한다. 격변하는 통상 환경 속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폐기 위기에까지 몰리지만, 기민한 상황 판단과 전략적 대응으로 우리는 조기에, 실리를 챙기며 협상을 타결한다. 그 결과, 다른 나라들이 무역전쟁의 내홍을 겪는 와중에도 우리 기업들은 안정 속에 차분히 수출시장을 확대해 나갈 수 있게 된다. 뒤이은 쾌거인 2019년 4월의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 승소는 세계무역기구(WTO) 위생검역 분쟁 역사상 1심 판결을 최종 판정에서 뒤집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글로벌 통상질서가 급변하는 가운데 정부는 우리 외교와 경제통상 협력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 신남방·신북방 정책을 적극 추진한다. 세계 최대 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협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타결하고, 인도네시아·캄보디아·필리핀과도 연이어 FTA를 체결해 신남방 핵심 파트너와의 FTA 네트워크를 완성한다. 아울러 아시아 최초로 중미 5개국과의 FTA를 체결하고, 기술 강국 이스라엘과도 FTA를 완료해 글로벌 FTA 네트워크를 2016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79%(52개국, 15건)에서 2021년에는 85%(59개국, 22건)까지 끌어올렸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공급망 재편 움직임과 디지털·그린 이코노미로의 전환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우리는 ‘국부창출형 통상’ 전략을 내걸고 공급망·기술·디지털·백신·탄소중립 5대 전략 분야를 중심으로 발 빠르게 움직이며 통상의 외연을 확장해 왔다. 그 결과, 미국과 반도체·배터리 등 핵심 산업의 공급망 협력이 본격화하고 있으며, 호주와는 핵심 광물 협력을 구체화해 나가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디지털 협정인 한·싱가포르 디지털동반자협정을 타결했으며, 지난 1월에는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 가입 협상도 개시했다. 미국과 글로벌 백신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등 ‘글로벌 백신 허브화’ 비전 구현 또한 통상에서 적극 지원하고 있다.

통상 당국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5대 전략 분야 중심 국부창출형 통상정책을 지속 추진하고,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등 아태 무역질서의 변화에도 적극 대응해 머잖아 수출 1조 달러 시대, G7 통상 강국 도약을 선도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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