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헌·김월회의 고전 매트릭스 - ⑫ 정치와 종교

“신하에게 병 옮기라”는 조언
초나라 소공은 탄식하며 거절

군주는 ‘혼자 잘됨’ 항상 경계
‘사심 없는 나’의 확장 힘써야


서기전 498년, 초나라에서 사흘간 붉은 새떼 같은 구름이 태양을 끼고 비상하는 듯한 현상이 나타났다. 제후 소공은 천자의 조정에 관리를 파견하여 태사에게 무슨 징조인지를 물었다. 태사는 천문, 역법, 역사를 비롯하여 신과 관련된 분야의 최고가 맡던 벼슬이었다.

태사는 점을 치더니 소공이 중병에 걸릴 징조라고 풀이했다. 피하고자 한다면 푸닥거리를 해서 병을 신하인 영윤이나 사마에게로 옮기면 된다고 조언했다. 이를 전해 들은 소공은 탄식하며 말했다. “내 배 속의 중병을 없앤다면서 그 병을 나의 팔다리 같은 이들에게로 옮겨 놓는다면 무슨 이득이 있으리오. 나에게 큰 죄가 없다면 하늘이 나를 어찌 요절케 하겠는가!”


제후는 한 나라의 군주이다. 군주인 자가 제 몸 하나 건사하자고 중병을 남에게 옮기는 굿을 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더욱이 큰 죄를 진 적이 없으니 제명에 못 죽는 벌은 받지 않으리라고 자신한다. 소공이 훌륭한 군주였다는 얘기를 함이 아니다. ‘춘추좌전’에 실린 이 일화에는 두 가지 무척 중요한 관념이 드러나 있다.

하나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면 신일지라도 자기 뜻대로 벌하지 못한다는 관념이다. 소공의 시대는 문명의 무게추가 신에게서 인간으로 한창 옮겨지던 때였다.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게 움직이던 신이 이제는 인간의 도덕적 실천에 따라 움직인다고 여겨졌다. 하여 무속이 강했던 지역의 군주였음에도 소공은 인간의 노력과 무관하게 신이 개입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신은 덕 있는 자를 돕고 죄 있는 자만 벌한다”는 관념이 일국의 최고 통치자 입에서 선언되었음이다.

다른 하나는 범위의 문제이다. 군주가 나라고 여기는 범위, 뒤집으면 남이라고 여기는 범위에 대한 관념이다. 소공은 자기가 중병에 걸리지 않고자 “남”을 아프게 할 수 없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 “나의 팔다리 같은 이”라고 말했다.

남을 나의 일부로 여김이 당연하다는 듯, 중신들을 자신의 지체라고 일컬었다. 일종의 ‘나’의 확장이니 그만큼 ‘남’의 범위가 줄어든다. 하여 이는 위정자에게 기본으로 요구된다.

좌구명 ‘춘추좌전’
좌구명 ‘춘추좌전’
이기적인 자아로는 그러한 확장이 불가능하다. 나의 확장이 사심 없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역지사지가 이루어지며, 그래야 사람을 폭력이나 기망, 부림의 대상이 아닌 대화와 협업, 호혜의 대상으로 섬길 줄 알게 된다. 나아가 공영, 그러니까 더불어 잘 살아가는 일상을 일구어 가게도 된다. 선조들이 “이민(利民)”과 “안민(安民)”, 그러니까 백성을 이롭게 하고, 안정되게 살게 함의 선결조건으로 “백성을 피붙이같이 대한다”는 “친민(親民)”을 요구했던 까닭이다. 피붙이처럼 대한다고 함은 나의 일부로 여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소공이 비록 좋은 군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닐지라도 점술을 대하는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사뭇 이롭다. 사실 내가 친 점이 내게 이득을 안겨줌에,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무얼 어떻게 믿든 누가 상관할 일이겠는가? 그런데 소공 당시 군주란 자기 이익을 위해 점을 치는 존재가 아니라 인민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점을 치는 존재였다. 그러니 얘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설령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서 이득을 봤다고 해도 군주는 정당화되지 못했다. 군주에게 이득이란 백성이 이롭게 되고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이기에, 자기 혼자만 잘됨은 군주에겐 경계의 대상이었다. 백성은 가난한데 군주만 부유한 것처럼 말이다.

종교는 지속 가능한 안정적 삶을 국가가 제도 등으로 실질적으로 받쳐주지 못할 때, 그리하여 사회적 을에게 삶의 안정과 그것의 지속 가능한 미래에 대한 기대가 막막할 때 더욱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위정자가 종교의 힘을 빌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지속 가능한 삶과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지속 가능한 삶과 미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내 이익’의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심 없는 나’의 확장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2500년도 더 된 저 옛날에 이미 깨닫고 있었던 위정자의 자격이다. 디지털 대전환의 첨단을 걷는다고 자부하는 우리 사회와 다르게 말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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