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지인이 전한 ‘마지막 모습’
“죽음 준비하면서도 늘 일 생각
얼마 전까지 원고 수정·정리
‘영원한 현역’ 면모 잃지 않아”
내달 미발표 詩모아 시집 출간
육성으로 서문 불러주기도 해
돌아가시기 몇시간 전까지도
美 손주들과 웃으며 화상통화
“아버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계획했던 작업을 놓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의식을 놓지 않고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까지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려 했습니다. 너무도 슬픈 일이지만, 당신 의지대로 마무리한 것은 아버님께 어울리는 멋진 엔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의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디어콘텐츠센터장은 지난 26일 별세한 부친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하며 이같이 말했다. 2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빈소에서 만난 이 센터장은 “아버님은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워낙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분이었다”며 “바로 얼마 전까지도 ‘(원고를) 고쳐야 하는데…’라는 말씀을 계속하면서 일을 놓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 교수가 죽음 앞에 체념하거나 좌절하기보다는 평소처럼 자신의 일을 하다 죽음을 맞겠다는 소신을 온몸으로 실천했다는 얘기다.
이 교수와 마지막 작업을 함께했던 지인들과 출판계 인사들도 ‘영원한 현역’의 면모를 잃지 않았던 이 교수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하고 있다. 대담집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비롯해 ‘메멘토 모리’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등을 출간한 열림원의 김현정 주간은 “일주일 전쯤 문안 인사를 갔는데 그날따라 사진을 찍고 가라고 하시더라”며 “함께 사진을 찍은 그 순간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김 주간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작업 때 투병 중임에도 당신의 말이 잘못 전달될 소지가 있는 부분을 꼼꼼히 짚어내 편집자로서 많이 배웠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책 내용 가운데 ‘너답게 존재했느냐. 너는 너로 살아라’ ‘진정한 부자(富者)는 나만의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라는 말씀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열림원은 다음 달 중순 이 교수의 맏딸인 고 이민아 목사 10주기에 맞춰 시집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를 출간한다. 이 교수의 예전 시들과 미발표 작품, 고 노태우 전 대통령 추모시를 담은 책으로, 헌팅턴 비치는 이 목사가 미국에서 살았던 곳이다. 김 주간은 “나흘 전쯤 선생님이 육성으로 시집에 담길 서문을 불러주셨다”며 “마지막을 예감한 듯 ‘네가 간 길을 이제 내가 간다. 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는 말을 남기셨다”고 전했다.
지난 2020년 ‘한국인 이야기 1-너 어디에서 왔니’를 펴낸 정해종 파람북 대표는 “총 10권으로 계획한 시리즈 중 3권 정도는 바로 낼 수 있는 상황이고 나머지 원고도 거의 완성됐다”며 “4월께 나올 2권은 젓가락의 문화 유전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이 교수가 창립한 문예지 ‘문학사상’ 편집장을 지냈다. 그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어제 말씀과 오늘 말씀이 다른 분’이었던 선생님은 끊임없는 공부와 자기갱신으로 지식을 업데이트했다”며 “한마디로 조선이 낳은 천재”라고 추모했다.
이 교수는 지난 26일 낮 12시 20분쯤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별세했다. 이 교수는 2017년 췌장암이 발병해 두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항암치료는 거부한 채 저술 활동을 이어왔다. 이 센터장은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에도 미국에 있는 손주들과 화상통화를 하며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며 “기력이 떨어져 말로 소통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마지막까지 의식이 또렷했고, 고통 없이 평화롭게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 교수의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葬)으로 치러진다. 3월 1일까지 오전 9시~오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된 빈소에서 조문할 수 있다. 발인은 2일 오전 8시 30분이고, 영결식은 같은 날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엄수된다.
오남석·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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