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정치부 부장

문재인 정부나 여당 인사들이 한·미 동맹에 대한 우려가 제기될 때면 늘 하는 말이 “한·미 관계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이다. 북한 비핵화 방안이나 남북 경제협력, 종전선언, 베이징(北京)동계올림픽 보이콧 등 주요 현안마다 한·미가 충돌 조짐을 보일 때면 이 말을 되풀이하면서 반박해왔다. 양국 간 이견은 당연한 일이며 항상 긴밀하게 협의가 이뤄지고 있으니 걱정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인해 이 공언이 얼마나 허언이었는지, 미국 정부가 동맹이라는 한국을 얼마나 신뢰하지 않는지만 드러나게 됐다.

미국은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대러 수출통제 조치로 미국산 기술이나 소프트웨어 등을 활용해 제3국에서 생산된 제품과 장비를 러시아에 수출할 때 미국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해외직접제품규칙(FDPR)’ 적용을 발표했다. 미국은 대신 ‘해당 규정에서 제외되는 파트너 국가들’이라는 항목을 통해 미국과 보조를 맞춰 대러 독자제재를 한 유럽연합(EU) 27개국과 호주, 캐나다, 일본, 뉴질랜드, 영국 등 32개국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해준다고 밝혔다. 미국의 주요 우방국 중 FDPR 적용 예외를 받지 못한 국가는 한국뿐이다. 미국 FDPR 적용 발표 당일 청와대의 태도는 이런 분위기를 예측조차 못 했음을 보여준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TBS 인터뷰에서 현지 기업과 교민 문제를 언급하면서 “우리만 독자적으로 뭘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제재를 하게 된다면 우리가 연결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업을 핑계로 독자제재나 제재 동참에 소극적으로 굴었는데 오히려 기업들의 피해만 키우게 된 것이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문재인 대통령은 28일 “러시아에 대한 국제제재에 동참하면서 제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대응 방안을 확실하게 마련해달라”고 지시했고, 정부는 뒤늦게 FDPR 적용 제외를 받기 위해 관료들을 미국으로 급파하며 협상에 들어갔다.

이번 사태는 중국의 패권 추구나 인권 침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겪으면서 한국을 향한 미국의 의구심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은 중국을 제1의 위협으로 지목하고 군사적·경제적 견제를 강화하고 있지만, 한국은 줄타기 중이다. 신장(新疆)위구르 인권 탄압에 대한 비판도 미적거린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략했는데 북침 때 국제사회 도움을 받았던 한국은 독자제재는커녕 국제사회 제재 동참에도 소극적이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평가는 “한국은 중국에 관해 하는 것에 비해 캄보디아나 미얀마, 쿠바의 잘못을 비판할 때 훨씬 더 잘하고 있다”(마크 램버트 미 국무부 부차관보), “한국의 소심하고 미온적인 (대러 제재) 접근은 솔직히 부끄러운 일이고 또 어리석은 것”(마크 피츠패트릭 전 국무부 부차관보)이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문 정부나 여당 인사들도 이제는 솔직히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한·미 관계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고. 한·미 관계가 좋다는 억지 주장은 한반도 안정의 핵심인 한·미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김석

김석 기자

문화일보 /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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