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마트에서 울다 |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美인디밴드 활동 한국계 미국인
엄마요리 그리며 쓴 성장 에세이
韓식재료 전문으로 파는 마켓
이민자에겐 ‘고향의 맛’ 찾는곳
고추장 양까지 잔소리하던 엄마
떨어져 살고부터 소중함 깨달아
이 한국계 미국인은 책 제목처럼 H마트에만 가면 운다. H마트는 아시아 식재료를 전문으로 파는 슈퍼마켓 체인. 미국 14개 주 70여 곳에 있는 이 체인은 이민자들에게 ‘고향의 맛’을 찾게 해주는 곳이다. H는 ‘한아름’의 줄임말인데, ‘두 팔로 감싸 안을 만큼의 크기’라는 뜻처럼 김·뻥튀기·죠리퐁·만두피 등 없는 게 없다. 1세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딸은 엄마 덕분에 ‘완벽한 한국인 식성’을 갖게 됐다. 김치는 적당히 새콤한 맛이 나야 했고, 삼겹살은 바짝 구워야 했으며, 찌개는 혀가 델 정도로 뜨겁지 않으면 안 먹느니만 못했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7년이 흐른 지금도 딸은 주말이면 차를 몰고 H마트에 가 점심을 먹고 일주일 치 장을 봐온다.
모녀판 ‘미나리’라고 할 만한 ‘H마트에서 울다’는 요리를 매개로 엄마에 대한 추억과 정체성을 되새기는 성장 에세이다. 출간 즉시 미국 서점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은 뉴욕 타임스(NYT)·아마존 등에서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저자는 미국 인디 팝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가수이자 기타리스트인 미셸 자우너.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는 그래미 어워즈 후보에 두 차례 오른 실력파 뮤지션이다. 2017년과 2019년 내한공연을 열며 국내 팬도 늘려가고 있다.
모녀 사이가 처음부터 애틋했던 건 아니다. 딸은 비빔밥에 넣는 고추장 양부터 옷 입는 스타일까지 간섭하는 ‘잔소리꾼’ 엄마가 못마땅했다. 엄마는 딸이 다치기라도 하면 불같이 화를 내며 흉터 걱정부터 했다. 매정하고 엄하게 키워야 낯선 세계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둘의 갈등은 ‘진로’를 놓고 폭발했다. 고등학생이 된 딸이 음악을 향한 꿈을 키우자 엄마는 “굶어 죽는 음악가가 되고 싶냐”며 뜯어말렸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린 딸은 밤마다 어두운 숲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시간을 때웠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도 둘 사이를 악화시켰다. 한국인임을 잊고 싶었던 자우너는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친구들이 먹는 걸 따라 주문했고, 엄마 이름을 딴 ‘정미’라는 미들 네임도 지워버렸다. “학교에서 달랑 혼자 한국 사람이라는 게 어떤 기분인지 엄마는 몰라”라면서.
신기하게도 딸이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한 건 두 사람이 떨어져 살고부터다. 자우너는 대학 진학을 위해 가족과 살던 오리건주의 소도시를 떠났다. 엄마는 음악가의 꿈을 접지 않은 딸과 흔쾌한 마음으로 작별한 건 아니지만, 객지 생활을 하는 딸을 위해 매달 큼지막한 상자를 보냈다. 상자엔 한인 마트에서 산 달달한 쌀강정과 즉석밥, 컵라면이 넉넉히 들어 있었다. 한번은 엄마가 부쳐준 카우보이 부츠를 받고 신어 봤는데 웬일인지 가죽이 부드럽게 길들여 있었다. 알고 보니 딸이 불편하지 않도록 일주일 동안 집 안에서 신고 다닌 덕분이었다. 딸은 깨달았다. 아무리 사이가 어긋나도 “엄마의 마음속에선 내가 절대 멀리 떠나 있지 않음을”, 사랑이란 “친절을 베풀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것”임을.
이렇게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할 무렵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밴드 활동을 중단하고 오리건주로 달려간 자우너는 결심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10대 시절 내뱉은 모든 독설을 만회하겠다고. 자우너는 예전처럼 친구들과 “무작정 어둠 속으로 달아날 궁리를 하는 대신 어둠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유기농 토마토 주스와 계란찜, 잣죽을 만들었다. 직접 요리를 하며 엄마를 단순히 ‘이해’만 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게 됐다. 어릴 때 자우너는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나 하는 엄마를 내심 얕잡아봤다. 하지만 엄마는 그저 가족에게 사랑을 나눠주는(loving) 사람이 아니라 사랑스러운(lovely) 개성을 지닌 여성이며, 산해진미를 즐기고 요리할 줄 아는 아마추어 예술가임을 뒤늦게 알게 됐다. 얼마 후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자우너는 요리를 멈추지 않았다. 발효를 통해 새 생명을 얻는 한식처럼 엄마의 유산을 공유하며 엄마가 곁에 없어도 한국인임을 증명하려 했다.
음식을 삶에 비유한 이 섬세한 성장기엔 무참하고도 숭고한 장면이 나온다. 엄마의 장례식을 치른 날 자우너는 아빠와 함께 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에 갔다. 메뉴를 살피고는 가장 비싼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자우너는 고기를 한 조각씩 잘라 걸신들린 듯 허겁지겁 씹어먹었다. 배를 가득 채우자 꾹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책은 음식의 멋과 맛이 동시에 떠오르는 공감각적 문장으로 인생이란 결국 먹고 사는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엄마를 잃은 날조차 식욕이 사라지지 않기에 무참한 존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떤 아픔에도 먹는 행위를 통해 버텨낼 힘을 얻기에 숭고한 존재다. 408쪽, 1만6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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