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릭 홉스봄 평전 | 리처드 J 에번스 지음 | 박원용·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민낯 체험
나치즘 대신 공산주의에 눈돌려
쿠바혁명 ‘게바라 통역’ 맡기도
위기 자초한 공산주의 비판하며
진보세력에 지적 활력 불어넣어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 ‘폭력의 시대’ 등으로 이어진 홉스봄의 저작은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이 근대로 접어들고, 산업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가 세계를 정복하며, 제국주의가 ‘피 묻은 황금’을 ‘아름다운 시절’로 찬미했던 19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표현된 파국으로 시작해 냉전과 함께 번영을 누렸던 극단의 20세기, 소련 붕괴 후 테러로 점철된 폭력의 21세기에 이르는 큰 흐름을 보여준다. “엄밀한 분석, 탁월한 문체, 생생한 해석, 흥미롭고 상세한 서술”을 겸비한 명저들이다.
‘에릭 홉스봄 평전’은 ‘역사 속의 삶’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역사의 현미경과 망원경이 능수능란하게 사용된다. 나치 제3제국 역사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 리처드 J 에번스는 이 책에서 홉스봄의 “개인적 경험과 내면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그 과정을 기록하는 한편, 그의 삶을 둘러싼 20세기 역사의 풍경을 세밀하게 펼쳐낸다.
‘지독하게 못생겼지만 똑똑한’ 홉스봄은 장기 19세기, 원초적 반란, 만들어진 전통 등 학문적 업적으로 역사 연구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학자였으나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나치가 장악한 베를린 거리에서 붉은 전단을 돌리고 쿠바 혁명에 뛰어들어 체 게바라의 통역으로 활약하며 영국 노동당 내부의 격렬한 노선 투쟁에 뛰어드는 등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직접 참여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영국 보안정보국(MI5)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 등 전 세계 진보세력의 행보에 영향을 준 그의 활동을 50년 넘게 감시할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독서와 자연 관찰을 좋아했던 홉스봄은 1917년 유대계 폴란드 이민자의 손자이자 영국인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된 홉스봄은 베를린 삼촌 집에서 동생과 함께 얹혀살면서 대공황과 함께 닥쳐온 자본주의의 파국을 체험한다. 노동자의 3분의 1이 직장을 잃는 생지옥에서 고통에 찬 시민들은 나치당과 공산주의에 눈을 돌린다.
독일 국민 다수의 선택은 나치였으나, ‘우연히’ 브레히트 시를 읽고 감명받은 홉스봄은 공산주의에 빠져든다. 유대인 ‘영국 소년’이 나치의 과격한 민족주의나 광적 반유대주의를 지지할 순 없지 않은가. 어린 고아 소년에게 공산주의는 “가난, 낡아빠진 옷, 삐걱대는 자전거에 대한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방법”이고, 잃어버린 “일체감과 소속감을 제공”해 준 피난처였다.
직장을 옮긴 삼촌을 따라 홉스봄은 나치의 희생자가 되기 전에 영국에 건너온다. 그러나 분열과 대립 끝에 나치에 정권을 내준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어리석음은 평생 홉스봄 사유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훗날, ‘위험한 인물’이자 ‘지적 구루’로 성장한 홉스봄이 마르크스주의에 충성하면서도 양심을 좇아 공산주의 현실에 눈감지 않고 성실하게 비판을 수행하고, 좌파·진보 동맹을 중시해서 신노동당을 짧게 찬양했다 말년에 내내 후회한 이유였다.
그러나 홉스봄이 재능을 발휘한 곳은 정치보다 학문이었다.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한 ‘뭐든지 아는 신입생’은 졸업 후 착실히 학문적 성과를 쌓아갔다. 그는 불법 행동 등 ‘사회적 산적 행위’를 통한 대중 저항을 다룬 ‘원초적 반란’, 조직되지 않은 문화적 반란의 한 형태로 재즈를 다룬 음악 평론으로 주목받았다. 1960년대부터 그는 프랑스혁명에서 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장기 19세기’ 연구에 정열을 기울이면서 활발한 출판 활동을 통해 베스트셀러 ‘페이퍼백 저자’로 이름을 알렸다. 그의 활동은 결국 무작정 소련을 옹호하다 위기에 빠진 마르크스주의를 구원하고, 진보세력에 새로운 지적 활력을 불어넣는 데 이바지했다.
이 책은 권력과 자본에 맞서서 평생 신념을 지켰던 한 위대한 지식인의 초상을 세밀화로 그려낸다. 폭력의 시대에 약자를 위해 지성과 언어를 사용하려 애쓰는 이들은 이 책에서 분명히 감동과 영감을 함께 얻게 될 것이다. 984쪽, 4만3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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