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은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이다.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그의 작품은 대개 오페라로 작곡돼 인기를 끌었는데 미하일 글린카의 ‘루슬란과 루드밀라’,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오네긴’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오페라로 세계 각지에서 자주 공연되면서 차이콥스키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됐다. 지난 2월 베이징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올림픽위원회 선수들이 금메달을 땄을 때 국가 대신 연주된 곡도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 도입부 멜로디였다.

세계 최대 오페라 극장인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피터 겔브 총감독은 블라디미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우크라이나와의 연대를 위해 푸틴을 지지하는 예술가, 푸틴이 후원한 예술가는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출신 소프라노 안네 네트렙코 등이 공연에서 배제됐지만, 예정됐던 오페라 ‘오네긴’ 공연은 25일부터 시작한다. 러시아가 낳은 불후의 명작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네긴’은 푸시킨과 차이콥스키가 우크라이나에 머물 때 탄생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푸시킨은 체제 저항시 때문에 페테르부르크에서 카미얀카(러시아명 카멘카)로 추방됐을 때 이 작품을 썼다. 차이콥스키는 결혼한 누이동생이 살던 카미얀카에서 해마다 휴양을 했는데 오페라 ‘오네긴’도 이때 작곡됐다.

우크라이나주재 일본 대사를 지낸 구로카와 유지가 쓴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에 따르면 오네긴이 탄생한 곳은 카미얀카의 귀족 바실리 다비도프의 영지다. 카미얀카는 키이우(키예프) 남쪽으로 100㎞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다비도프 영지에는 푸시킨과 차이콥스키 기념 박물관도 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주변은 러시아 예술혼의 산실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위대한 러시아 재건 망상에 사로잡힌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키이우 장악을 위해 연일 폭격을 하고 있다. 차이콥스키가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라고 극찬했던 카미얀카의 ‘오네긴’ 산실이 탈레반에 폭파된 바미얀 석불처럼 될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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