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판에는 심급제도가 있다.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해야 하지만, 그 재판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못이 있을 수 있다. 심급제도는 사람의 한계를 인정한 것이고, 그래서 재판에서 상소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보장하는 것이 헌법 제27조의 재판을 받을 권리에 충실한 모습이다.
국가기관이 분쟁의 당사자라고 해서 굳이 심급제도를 꺼릴 이유도 없다. 국가기관이 상소할 기회가 있는데도 무턱대고 1심 판결을 수용했다가 경우에 따라 직무유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렇듯 누구든지 누릴 수 있는 권리라 포기하라는 것이 어색한데,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 이런 포기를 권장했다.
서울행정법원은 2017년 6월 4일 민변이 환경부 장관을 상대로 용산 미군기지 환경오염 결과의 공개를 요구하는 정보공개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패소 판결에 대한 정부의 항소를 자제하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불법시위로 지연시킨 강정마을 주민과 좌파 단체 인사들에 대한 구상권 청구 포기 과정에서도 이런 취지를 언급했다. 재판에서 생길 오류를 생각하면 상소 포기는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그래도 국가가 잘못했을 가능성이 법원의 판단으로 확인됐다면 더는 국민에게 송사의 고통을 주지 않는 게 옳다는 취지에서 말한 것이라면 수용할 만하다. 단지 가능성만으로도 국민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겠다는 뜻이니 선의를 읽을 수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2월 10일 한국납세자연맹이 정부를 상대로 문 대통령의 취임 이후 구체적인 특활비 집행 실적과 김정숙 여사의 의상·구두 등 의전비용에 관한 지출 내용 등의 공개를 요구하는 정보공개 청구소송에서 대부분 정보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문 대통령의 종전 태도에 비춰 보면 당연히 항소를 포기하고 판결의 취지에 따라 공개함이 마땅한데, 이번에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며 항소했다.
소송을 제기한 한국납세자연맹이 대단히 무리한 소송을 제기한 것도 아니다. 현 정권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공격할 때 특활비 유용을 좋은 소재로 활용했다. 특활비 수사 보도를 통해 국민은 ‘특활비’라는 비용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고, 또 그 사용이 투명해야 한다는 당위도 확인했다. 그러니 같은 잣대로 문 대통령의 특활비 사용에 관해 궁금증을 가지는 건 당연한 국민적 요구다. 특별히 공개돼서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할 우려가 있는 정보라 보기 어렵고,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도 공개함이 바람직하다. 거부할 명분이 분명하지 않고, 거부 자체가 부적절한 특활비 유용의 자백으로 비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퇴임하면 아예 대통령 지정기록물로 묶어 장기간 비공개로 만들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나온다. 퇴임을 두 달 정도 두고 항소하는 것으로 보면 그럴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러나 대통령기록물법 제16조 제1항은 대통령 기록물이라고 하더라도 공개함을 원칙으로 하고,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할 우려가 있는 등 예외적 경우에만 비공개로 하도록 정하고 있다. 구차하고 억지스러운 사유를 대며 숨기려고 하기보다, 당당히 밝히는 것이 대통령 자신이 세운 원칙에 스스로 충실하게 대처하는 모습임에는 의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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