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스트의 밤 |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마친
오르한 파묵의 전염병 소설
120년전의 왜곡·조작·소문
현재의 일상과 마주하는 듯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오르한 파묵이 오랫동안 구상하고, 2016년 집필을 시작했다는 소설 ‘페스트의 밤’을 지배하는 건 이런 풍경이다. 공포와 충격보다는 기시감과 익숙함이 앞서지만, 역사소설에 미스터리를 결합한 소설은 오스만 제국의 몰락기이자 3차 페스트의 유행 시기를 배경으로 장대하고 매력적인 서사를 만들어냈다. 이야기는 그리스와 터키 사이, 동지중해 어딘가에 파묵이 세운 가상의 섬 ‘민게르’가 전염병과 전쟁을 벌이는 과정을 부마이자 의사인 ‘누리’를 중심으로 풀어낸다.
섬에는 체계적인 방역이 필요한 때다. 그런데 이스탄불에서 파견된 방역 전문가는 갑자기 살해당한다. 누리는 방역과 치료, 여기에 의문의 죽음을 밝혀야 할 임무까지 떠맡는다. 섬은 혼돈 그 자체. 진실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는 학자들과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정치인들은 서로 반목하고, 과학적 사실과 종교적 신념 사이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고 방황한다. 한때 이 아름다운 섬을 아끼던 주변 나라들은 민게르의 사람들이 섬 밖으로 나오는 걸 꺼린다. 국제 사회의 압력에 섬은 봉쇄되고, 할 수 있는 건 이제 단 하나. ‘스스로 구하라’.
지난해 터키에서 출간된 소설은 영미판이 나오기도 전에, 한국에서 먼저 선보이게 됐다. 파묵은 코로나19가 전 지구를 잡아먹기 전, 이미 책을 거의 다 쓴 것으로 알려졌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중에 상상했던 세계를 현실로 만나면 어떻게 될까. 아니, 어떤 작품이 나올까. ‘페스트의 밤’을 읽으며 이런 질문들을 던질 수밖에 없는 건, 지난 2년여 동안 우리가 마주한 실제 세계가 소설보다 덜하지 않다는 것, 때론 더 공포스럽고, 더 충격적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것은 유례없이 잔혹하고 매우 이상한 독서 경험이다. 120년 전 민게르에서 일어난 부정과 왜곡, 조작과 소문, 그리고 거짓 정보의 근원을 파고들며 우리는 ‘지금, 여기’의 일상을 고통스럽게 마주해야 하니 말이다.
파묵은 이미 ‘고요한 집’(1983)과 ‘하얀 성’(1985)에서도 전염병을 다룬 바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쓰는 중에 코로나19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내 소설 속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아마 자신도 놀란 우연의 일치였고 소설은 수정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게 독이었을지 약이었을지는 각자 읽는 이의 몫으로 남겨두고, 분명한 건 약 8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볼 때, 파묵이 실제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소설’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으며, 아주 오랜 세월(35년이라고 알려졌다) 동안 자료 조사와 공부를 지속해왔음을 알 수 있다.
격리를 뜻하는 ‘쿼런틴’이란 말의 어원부터 전염병 시기에 왜 연인들은 사랑에 더 절실해지는지, 종교 갈등과 정치적 긴장감이 전염병을 만나면 어떻게 분열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지 등 파묵은 소설을 통해 사람들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어떻게 전염병에 다르게 반응하고, 국가의 대응이 그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세밀하게 담았다. 그리하여 소설은 ‘미나 민게를리’라는 가상의 작가(파묵 자신)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짧고 극적인 기간에 인간들이 내린 결정을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이 작가의 존재 여부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이 소설의 바탕이 됐다고 하는 파키제 술탄이 언니에게 보낸 116통 편지의 진위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어디가 허구고 어디가 사실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쯤 되면 페스트가 창궐한 시기에 일어난 일들을 조사하는 것에는 “역사적인 방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소설적인 기법이 도움이 될 거라고” 한 파묵에게 이미 설득당한 후가 될 테니.
소설에서 파키제는 오스만제국 33대 술탄의 딸이자 의사 누리의 아내다. 그녀는 누리로부터 매일 밤 전염병 현황과 민게르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해 듣고, 이를 감성적이면서도 영리하게 편지로 옮겨 이 ‘역사 소설’을 탄생하게 한다. 팬데믹 시대에 읽는, 또 다른 팬데믹 시대의 이야기건만, 아주 조금은 추억처럼 친숙하고 따스한 이미지가 겹쳐지는 건 이 때문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와 그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밤’이 있다는 것. 여기에, 파묵이 직접 그리고 선택했다는 동화풍 표지도 역병이란 터널을 지나고 있는 시대의 음울함을 다소 덜어낸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맛보게 될 것이다”라는 코란 구절을 읽으며 울고, 체념과 운명주의에 빠지던 민게르 사람들은 다시 일어나 페스트와 맞서 싸울 힘을 얻을 것인가. ‘페스트의 밤’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아침을 맞이할 것인가. 소설의 결말과 상관없이, 또 알 수 없는 우리의 미래와 상관없이 단언할 수 있는 건 지금 또 하나의 ‘팬데믹 소설’ 정전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이후 자주 소환되는 대니얼 디포의 ‘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1772)나,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약혼자들’(1827),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1947)처럼. 그렇다 해도 아주 먼 훗날에 또 다른 전염병이 이 소설을 소환하는 일은, 그런 날은 오지 않으면 좋겠다. 780쪽, 1만90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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