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립습니다 - 김춘자(1946∼2001)

아직도 맵싸한 겨울 기운이 남아 있는 3월, 곧 봄이 오고 연분홍 진달래 꽃물이 번져갈 연화산을 바라보자니 20년여 전 떠나보낸 언니에 대한 그리움이 내 가슴을 적시곤 합니다. 언니는 간암에 걸려 좋다 하는 서울 병원들을 찾아다녔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결국은 서울대병원에서 생을 마쳤지요. 이곳 연화산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육신은 한 줌 재가 돼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지요. 한 줌 가루가 된 육신이 만발했던 연분홍 진달래 꽃잎 위에 뿌려지던 게 5월 초의 일이었습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향 땅에 뿌려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언니는 그걸 바라지 않았다고 해요. 고향에 대한 애착만큼이나 그곳에서의 힘들었던 기억도 있어서인가 봅니다.

자매들이 모처럼 시간을 내 서울대병원에 언니 병문안을 갔을 때가 생각나네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2월 말이나 3월 초쯤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청량리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서울대병원으로 가던 길, 바람이 불자 을씨년스럽게 나무들이 흔들리던 장면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어요. 병실에 누워 있는 언니를 보고 정말로 글로만 보고, 말로만 듣던 ‘사람이 반쪽이 됐다’는 말, ‘얼마나 항암 치료가 힘들고 독했으면 저렇게 수척해졌을까’라는 생각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던 기억도 떠오르고요.

얼마 안 돼 하늘나라로 떠나간 언니 모습은 긴 세월에 차츰 희미해졌지만, 마음속 그리움은 지워지질 않았습니다. 저희 육 남매 아버지께선 대한석탄공사에서 수십 년 근무하다 정년퇴직하면서 모은 돈으로 공기 좋은 농촌에 살림을 마련하고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께선 석공에서 수십 년 일하며 생긴 후유증으로 병원을 오가며 많은 돈을 탕진하다시피 했고, 결국은 오래 사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는 우리 육 남매를 건사하느라 무진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 와중에 저 위에 하나뿐인 언니는 시집을 갔는데 씀씀이가 큰 남자를 만나 힘든 시기를 겪었습니다.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꾸렸지만 조금씩 모은 돈은 가정에 보탬이 되기보다는 집안에 드는 비용이 더 많았습니다.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는 언니의 모습을 지켜보는 저는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언니는 이미 시집간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 어찌해 볼 도리 없이 지켜만 봐야 하는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기도 했어요. 그나마 시집간 곳이 멀지 않아 자주 만날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을까요.

언니가 병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다녀온 이후, 어머니를 도와 우리 육 남매를 잘 이끌어준 뚝심 있는 언니는 병마를 잘 이겨내리라 믿었는데, 차마 사망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지요.

봄이 오는 3월 어느 날, 언니에게 보내는 마음속 글을 적으며 제 심정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언니야, 저 연화산에 봄은 벌써 20년이 넘게 오고 갔네. 저 산 중턱에 올라 꽃구경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강산은 많이 변해 이제는 올라가는 길도 없어져 버렸어. 창가에 앉아 제 삶을 미처 다 못 살고 떠난 언니를 그리며 종일 저 산만 바라보고 있어. 나도 삼 남매를 둔 엄마로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이제 나이도 많이 들어 인생 황혼길에 접어들었어. 그립고 보고 싶고, 못 잊을 언니야. 하늘나라에서 아버지, 어머니, 동생 하고 잘 지내고 있어.’

동생 춘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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