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환의 음악동네 - 샤프 ‘연극이 끝난 후’

모두에게 길고 긴 밤이 몇 년에 한 번씩 찾아온다. 새벽이 가까워져 올수록 풍경이 갈라진다. 한쪽은 웃음꽃, 한쪽은 눈물바다. 선거캠프가 해체된 자리에 음악캠프를 임시로 꾸려본다. 선곡의 기준은 위로와 다짐이 좋겠다. 기간 내내 난무하다시피 했던 말(아무말 대잔치), 고함들에게 먼저 정중한 고별사를 띄우자. 오프닝 곡으로는 ‘희망사항’(1989)이 적당하다. 수없이(개념 없이) 이상형을 나열하는 철부지(변진섭)에게 노련한 상대(노영심)는 마지막 밑줄로 정리(촌철살인)를 깔끔하게 해준다. ‘여보세요 날 좀 잠깐보세요/ 희망사항이 정말 거창하군요/ 그런 여자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난 그런 남자가 좋더라.’ 역지사지를 깨우쳐주는 이 노래엔 시즌2도 있다. 중간평가하듯 자잘하게 작성한 매니페스토(실천방안체크) 항목이 궁금하다면 ‘별걸 다 기억하는 남자’(1992) 가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살면서 모든 걸 다 기억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걸 기억하면 된다. 비지스의 ‘돈 포겟 투 리멤버’(Don’t forget to remember)가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되새겨야 할 진실이 때마다 내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I keep telling myself that it’s true) ‘하지 말라’(Don’t)는 노래가 나왔으니 영국의 록밴드 오아시스도 비대면으로 초대하자. 제목이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지난 일에 대한 분노를 삭여라’(Don’t look back in Anger) 존 오스본의 희곡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Look Back in Anger, 1956)를 보기 좋게 비틀었다. 마음의 눈을 열고 들어가면(Slip inside the eye of your mind) 미처 몰랐던 더 나은 세상을 찾아낼 거라고(Don’t you know you might find a better place to play) 이름(오아시스)처럼 조언한다.

주철환 프로듀서·작가·노래채집가
주철환 프로듀서·작가·노래채집가
슬기로운 사람의 수첩엔 기억할 것도 많지만 가끔씩 지워야 할 것도 생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tvN)에도 나왔던 노래 ‘이젠 잊기로 해요’는 쎄시봉 가수 이장희의 자작곡(1974)이다. 당시 스물일곱 살의 혈기 방장한 젊은이는 사람 없는 성당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던 일, 술 취한 밤 그대에게 고백했던 모든 일들을 잊자고 다짐한다. 그러나 연애가 끝났다고 기억마저 사라지랴. 더구나 사랑의 기억엔 공소시효가 없다. 이 노래의 미덕은 오히려 잊지 말라 구걸하지 않고 잊어 달라 강요하지 않는 담백함이다.

땀과 눈물도 때로는 배반의 대열에 가담한다. ‘누구를 기다리나/ 무엇을 바라는가’(이수만 ‘모든 것 끝난 뒤’ 중) 승자건 패자건 선거가 끝났다고 모든 게 끝난 양 구는 자에게 미래는 손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만약 선거캠프의 철수장면을 뮤직비디오로 찍는다면 나는 1980년 대학가요제(MBC)에서 은상을 받은 샤프의 ‘연극이 끝난 후’를 선곡하고 싶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적이 있나요/ 음악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도 이젠 다 멈춘 채/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아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선거 때는 상대방을 악의 축으로 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악인이라기보다는 악역을 맡은 것에 불과하다. ‘배우는 무대 옷을 입고 노래하며 춤추고/ 불빛은 배우를 따라서 바삐 돌아가지만/ 끝나면 모두들 떠나 버리고 무대 위엔 정적만이.’ 고독만이 흐르는 풍경이 선거판과도 닮지 않았는가. 1절이 객석에서 바라본 무대라면 2절은 무대에서 바라본 객석이다. ‘힘찬 박수도 뜨겁던 관객의 찬사도 이젠 다 사라져/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있죠/ 침묵만이 흐르고 있죠.’

객관화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관객은 열띤 연기를 보고 때론 울고 웃으며/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착각도 하지만/ 끝나면 모두들 떠나버리고 객석에는 정적만이’ 고독만이 흐른다. 노래의 교훈은 간단하다. 인생이 끝난 게 아니라 연극이 끝난 것이다.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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