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문학자 심경호 교수 신간 ‘호, 주인翁의 이름’ 출간
고려시대 전해져 조선때 대유행
문인·관료·승려·여성 널리 사용
“인생 전환기 심적 상태 다잡고
타자와 관계 정립 수단 활용돼
정약용·김정희가 호 많은 이유”
“일제때 ‘필명’은 언론탄압 산물
최근 닉네임, 페르소나의 허명”
그런데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옛사람들은 하나의 이름만 가진 게 아니었다. 태어나서 부여받는 명(名), 어릴 때부터 성년 전까지 불리던 해명(孩名), 성년식인 관례(남성)와 계례(여성)를 치르면서 부여받는 자(字) 외에도 삶의 전환기마다 호(號)를 새로운 이름으로 사용했다.
특히 호는 본인이 직접 선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널리 사용됐다. 심지어 생전에만 새 호를 갖는 게 아니었다. 공적을 세운 사람이 죽으면 국가는 고인에게 시호(諡號)를 내렸다. 본인은 호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동료나 제자들이 사후에 사적인 시호를 올리기도 했고, 후인들이 문집을 간행하면서 호를 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문학자인 심경호 고려대 명예교수의 새 책 ‘호, 주인옹의 이름’(고려대 출판문화원)을 통해 이처럼 생전이나 사후에 여러 이름을 지님으로써 시기마다 각별한 존재로 거듭 태어났던 옛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호의 카탈로그’격인 이 책에서 저자는 옛사람들이 호를 가졌던 이유와 호를 짓는 법, 호에 의미를 부여한 방식 등을 깊게 들여다봤다.
저자에 따르면, 호를 짓는 관습은 중국 남북조 시대에 송나라와 양나라에 걸쳐 살았던 도홍경(456~536)이 남에게 서찰을 보낼 때 화양은거(華陽隱居)라 자칭한 데서 비롯됐다. 고려 시대에 한반도로 전해져 조선 시대에 크게 유행했다. 문묵(文墨)에 종사한 문인·관료와 중인·서얼 독서층, 무인, 승려, 여성 등이 모두 호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일반적으로는 일상생활을 하는 거처 근처의 산수, 바위, 나무의 이름을 호로 쓰거나 그것에 이름을 붙여 호로 사용했다. 생장지나 선영, 본관의 지명을 따오거나 존경하는 인물과 관련된 글자를 사용하기도 했다. 남의 호를 지어줄 때는 좋은 글자를 붙여줬지만, 자신의 호를 직접 지을 때는 우(愚·어리석음), 노(魯·둔하고 어리석음), 졸(拙·졸렬함), 우(迂·사리에 어두움)자 등을 넣어 겸양의 뜻을 보였다.
한 사람이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호를 사용한 사실은 이와 무관치 않다. 정약용(1762~1836)과 김정희(1786~1856)가 대표적이다. 정약용은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 초당 인근의 차밭이 있는 산에서 따온 다산(茶山)이라는 호로 유명하지만, 이 외에도 여유당(與猶堂), 여유병옹(與猶病翁), 사암(俟菴),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열수옹(水翁) 등 많은 호를 사용했다. 사후인 1910년 순종이 하사한 문도(文度)도 정약용의 호다. ‘여유’가 들어간 것은 경기 남양주 생가 이름(여유당)과 연결되고, ‘철마산’은 고향의 산, ‘열수’는 고향 인근 한강 등과 관련이 있다.
김정희는 처음에는 난초 치는 것을 좋아해 현란(玄蘭)이란 호를 사용하다 금석의 역사가라는 의미로 추사(秋史)로 바꾼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밖에도 김정희는 완당(阮堂), 담재(覃齋), 예당(禮堂), 시암(詩庵), 완파(阮坡), 과노(果老),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200종에 달하는 호를 사용했다.
저자는 근대 이후 필명(筆名)이나 닉네임, 인터넷 ID 등이 본명을 대신해 사용되고 있지만, 이는 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필명은 일제강점기와 언론탄압 과정에서 형성돼 호와 달리 성찰의 의미나 개방성·통용성을 갖지 못하며, 닉네임과 ID 역시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자신을 감추는 수단이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호를 사용하는 게 호에 표명된 가치나 이념의 실현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거창한 호를 갖고도 그에 걸맞게 살지 못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결국 한 개인에게 호가 ‘주인옹의 본명’이냐 ‘페르소나의 허명’이냐는 그의 삶에 달린 셈이다.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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