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카렐교와 구시가지 전경. 오래된 건물, 수직의 높은 첨탑들, 복잡한 골목과 광장들이 모여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프라하의 카렐교와 구시가지 전경. 오래된 건물, 수직의 높은 첨탑들, 복잡한 골목과 광장들이 모여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 장은수의 지식카페 - ⑬ 저항의 도시, 프라하

1348년 중부 유럽서 가장 오래된 카렐대는 종교개혁의 발원지… 청년들 중세적 사회구조에 의문 품고 급진 사상 무장
릴케·차페크·쿤데라 등 배출… 카프카, 소설 ‘변신’서 ‘인간-벌레’라는 상징 통해 자신 상실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 그려


“남자와 여자는 어둠이 내려앉은 다리를 거닌다/ 희미한 불빛 아래 성자들의 상을 지나……// 잿빛 하늘을 떠도는 구름은 신비로운 교회 탑을 만난다.”

독일 철학자 크리스티안 노르베르크슐츠의 프라하 찬가다. “저물녘 강물”은 프라하 복판을 가로지르는 블타바 강을, “어둠이 내려앉은 다리”는 카렐교를 말한다. 길이 55m에 이르는 이 다리 난간에는 “성자들의 상” 서른 개가 놓여 있다. 17세기 중반부터 250년에 걸쳐서 만든 조각상들로 체코의 역사를 상징한다.

카렐교 동쪽에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있다. 이곳은 세속의 공간이다. 오래된 건물과 복잡한 골목, 떠들썩한 가게와 웅성대는 시장, 말이 쏟아지고 토론이 불타는 카페, 항거가 일어나고 혁명이 시작되는 광장 등이 모여 있다. 후스 전쟁에서 프라하의 봄에 이르는 저항의 역사가 늘 이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일찍이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프라하를 “천 개의 탑과 천 개의 종루로 이루어진 도시”라 불렀다. 1365년에 건립된 틴 성당의 두 첨탑, 옛 시청의 대형 천문시계, 카렐교 양쪽 탑 등 수직의 높은 건축물이 수없이 솟아 있다.

탑의 스카이라인을 따라 자연스레 시선을 카렐교 서쪽으로 옮기면, 구름 아래 닿아 있는 “신비로운 성당 탑”을 만난다. 프라하 왕궁에 속한 성 비투스 성당의 첨탑이다. 이곳은 성스러운 공간이다. “마을 길은 성으로 향하지 않았다. 길은 성으로 향하는 듯하다가 마치 의도한 것처럼 성으로부터 구부러져 좀처럼 성에 가까워지지 않았다.”

프란츠 카프카가 ‘성’에서 묘사했듯, 시내에서 올려다보면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은 왕궁과 성당 등은 닿지 못할 곳처럼 보였다. 고통에 지친 시민들이 하소연을 위해 길을 나서도 구름 위 성에는 다다를 수 없었다.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의 선율처럼, 블타바 강은 성과 속, 두 프라하의 공존과 조화, 갈등과 투쟁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흘러간다.

프라하는 유럽의 배꼽이자 진주다. 동서양 중개무역의 요충지로 12세기 이래 중부 유럽의 중심 도시였던 이 오랜 도시에는 남쪽의 라틴, 북쪽의 게르만, 서쪽의 갈리아, 동쪽의 슬라브와 함께 유대와 집시의 문화까지 퇴적돼 있다. 그 덕분에 이 도시는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아르누보 등 11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다양한 건물 풍이 어울린 장소가 되었다.

현재의 프라하를 만든 것은 카렐 4세(1316∼1378)다. 보헤미아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그는 고향 프라하를 ‘북쪽의 로마’로 만들려고 했다. 당시 유럽은 영국-프랑스의 백년전쟁, 아비뇽유수 이후 교황이 동시에 셋이나 생기는 교회 대분열, 흑사병에 따른 인구 급감 등에 시달렸다. 외곽이라 피해가 덜했던 프라하는 그 틈에 왕권 강화와 영토 확장에 성공하면서 때 이른 전성기를 맞이했다.

카렐 4세는 프라하 궁전, 성 비투스 성당, 카렐교 등을 짓고, 몰려든 인구를 수용할 신시가지를 조성했다. 특히, 1348년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카렐대학을 건립했다. 대학은 인재 발굴과 육성, 상업과 산업의 발달, 과학 기술과 문화예술의 융성 등 복합 효과를 낳는다. 사상의 자유가 창조를 북돋우기 때문이다. 카렐대학과 함께 프라하엔 저항과 혁신이 정신의 토대로 굳게 자리 잡았다. 이 대학의 졸업생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프란츠 카프카, 카렐 차페크, 밀란 쿤데라 등이 불후의 문학을 남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쿤데라의 말처럼, 프라하는 늘 유럽의 전위였다. 카렐대학은 종교개혁의 발원지였다. 보헤미아, 작센, 바이에른, 폴란드 등에서 모인 학자들이 자유 속에서 개혁의 씨를 뿌렸다.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다 화형당한 설교자 얀 밀리치도 그중 하나였다. 청년 학생들은 그의 영향으로 중세적 사회 구조에 의문을 품고 급진 사상으로 기울어졌다.

“서로 사랑하라. 사람들 앞에서 진실, 즉 정의를 결코 부정하지 말라!”

구시가지 한복판에 있는 얀 후스의 동상에 새겨진 말이다. 후스는 프라하의 심장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카렐대학 졸업 후 교수로 일하면서, 주말엔 베들렘스카 예배당에서 라틴어 대신 체코어로 설교했다. 후스는 면벌부를 판매하는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성서가 신앙의 유일한 근거라고 선언한 후, 누구나 읽을 수 있게 성서를 체코어로 번역했다. 루터보다 100년 전이었다. 시민들은 열광했으나, 교황은 그를 종교재판에 부쳐 산 채로 불태웠다.

1419년 후스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저항이 시작됐다. 시민들은 시의회를 습격한 후, 의원들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악인을 처단하는 보헤미아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후스 전쟁’의 시작이고, ‘종교 전쟁’의 발발이었다. 1433년 처절히 진압될 때까지 프라하 시민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이로써 자유를 향한 프라하의 여정이 첫걸음을 떼었다.

1618년 프라하 시민은 빈에서 온 관리들을 창밖으로 내던졌다. 가톨릭을 강요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지배에 맞서 신앙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유럽 전체를 광신과 살육의 지옥에 빠뜨린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프라하는 또다시 처절히 패한 후, 1635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에 편입돼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한동안 침체했던 프라하는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 치세에 공업 도시로 개발되면서 급속한 자본주의화 과정과 함께 활력을 찾았다. 특히, 거주 제한이 풀린 유대인은 도시 곳곳에 스며들어 사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한편, 제국의 독일화 정책을 수용하면서 독일어 사용자로 프라하 상류층에 자리 잡았다.

자수성가해 경제적으로 부유한 아버지와 교양 있는 정신적 삶을 꿈꾸는 아들은 산업혁명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한 갈등이다. 프라하의 유대인 작가 카프카는 그 갈등을 가장 깊게 겪으며 살았다. 문학에만 헌신하고 싶었던 그에게 프라하는 중산층의 안정된 삶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폭력을 상징했다. “프라하에서 탈출하기. 나를 강타하는 인간적 해악에 맞서는 가능한 가장 강력한 대응 수단.”


카프카는 절망했다. “이 도시는 맹수의 발톱을 갖고 있다.” 프라하는 보석이라도 되는 양 그를 잔뜩 움켜쥐었고, 카프카는 죽기 얼마 전까지 프라하를 떠나지 못했다. “여기가 내 중·고등학교, 저 건물은 내 대학, 좀 더 왼쪽으로 내 사무실. 이 조그만 원 속에 내 삶 전체가 있어요.”

카프카는 낮에는 노동재해보험협회에서 하기 싫은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거리와 카페를 전전하다 늦은 밤 골방에서 홀로 소설을 썼다. ‘변신’ ‘성’ ‘소송’ 등의 작품은 돈 때문에 삶 전체를 징발당한 채 자유를 잃고 사는 한 인간의 불안을 다룬다.

카프카적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고도의 문서(정보) 처리 체계이다. 이 보이지 않는 권력은 인간 삶을 세부까지 감시하고 기록하고 통제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옴짝달싹 못 하고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하며 살다가 죽어 간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인간-벌레’라는 위대한 상징은 자신을 상실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의 강렬한 초상이 되었다. “프라하, 사람도 종교도 자기를 상실한다.” 근대의 새벽에 프라하가 정신의 해방을 위해 앞장섰던 자유의 도시였다면, 현대의 여명에 프라하는 인간 소외와 부조리를 고발하고, 그 극복을 모색하려는 영혼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자리 잡았다.

프라하 작가들은 예지적이었다. “당신은 체포되었소.” ‘소송’에서 카프카는 미래를 미리 살았다. 한 시민이 눈뜨자마자 이유 없이 체포되는 세계는 1945년 이후 프라하를 점령한 소비에트의 현실이었다. 쿤데라는 말한다. “카프카 소설의 이미지와 상황, 심지어는 특정한 문장들까지도 프라하의 삶의 일부였다.” 차페크는 100년 후 세계를 먼저 살았다. ‘R.U.R.’에서 그는 ‘로봇’이란 말을 처음 사용하며 기계가 노동을 대체해 인간 멸망을 가져오는 세계를 경고했다.

유럽의 보석 같은 존재였기에 프라하는 오스트리아, 독일, 소비에트 등 주변 강국의 먹이가 되었다. 그러나 블타바 강에는 물이 아니라 항상 자유가 흘렀다. 1968년 프라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일어섰다. ‘프라하의 봄’이었다. 곧바로 소비에트의 탱크에 진압당했으나, 프라하는 저항을 멈추지 않고 자유를 향해 걸어갔다. 1989년 프라하는 망명 동독인에게 길을 열어주면서 소비에트 붕괴에 앞장섰고, 바츨라프 하벨이 이끄는 ‘벨벳 혁명’을 통해 자유를 쟁취했다. 1993년 체코는 드디어 독립 국가가 되었다. 종교 전쟁의 패배 이후 358년, 나치 침략 후 65년 만이었다.


■ 용어설명

벨벳 혁명 : 프라하의 봄 이후, 후사크 정권은 수천 명을 체포하고 추방했으며,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하는 등 체제 단속에 돌입했다. 그러나 1976년 록그룹 ‘플라스틱 피플’의 탄압 사건을 계기로 후스의 후예는 다시 일어섰다. 얀 파토치카, 바츨라프 하벨 등이 주도한 ‘77 헌장’은 인권 존중, 학문 및 신앙의 자유, 도청 철폐 등을 요구했다.

당국의 탄압에도 반체제 운동이 이어지다, 1989년 11월 19일 카렐대학 학생 1만5000명의 반정부 시위와 함께 폭발했다. 하벨의 ‘시민포럼’이 이끄는 시민들 50만 명이 모여들자, 후사크 정권은 평화적 정권 교체를 약속하고, 선거를 통해 하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공산당 일당 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동유럽 민주화 혁명을 촉발한 체코 혁명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비단처럼 부드럽게 이루어져서 ‘벨벳 혁명’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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