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 前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오늘 3월 15일로 한·미 FTA가 발효된 지 만 10년이다. 타결까지 13개월, 이후 양국 의회 통과와 발효까지 59개월이 걸렸다. 덕분에 외무공무원으로서 해외 임지에는 가 볼 생각도 못 하고 마지막 6년을 여기에 매달리다 2011년 11월 국회 동의 절차가 끝나고 바로 한 달 뒤에 공직을 마감했다. 경력외교관으로서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국가가 필요로 한 일에 전심전력으로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한·미 양국 간 교역과 투자는 크게 증가했고 상호 시장점유율도 눈에 띄게 늘었다. 윈윈 협정으로 평가해도 좋을 만하다. 한·미 FTA는 우리 경제에 개방과 경쟁이라는 숨을 불어넣었고, 태평양 건너 미국 시장과 우리 시장 간의 거리를 대폭 좁힘으로써 동맹 간 결속에도 기여했다고 본다.

돌이켜보면 그 6년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협상이 끝나자마자 있었던 추가 협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와 촛불시위, 양국 정부 교체,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재협상 요구, 우리 국회에서의 소란(쇠톱, 쇠망치, 최루탄 등장) 등 편한 날이 없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협상을 타결하고 발효시킨 원동력은 정치적 리더십과 협상단 간의 신뢰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다’는 조롱 섞인 평은 물론, 여당과 지지자들로부터도 반대와 견제를 받았다. 2007년 4월 대국민 담화에서 ‘개방해서 성공한 나라도 있고 실패한 나라도 있지만, 개방하지 않고 성공한 나라는 없다’고 설파한 게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도 그해 말 대선에서 패하면서 마지막 산(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을 넘지 못했다. 후임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초에 이 문제를 풀었는데, 돌아온 것은 촛불시위였다. 시위 단체들의 주장은 정말 비과학적이고 선동적이었다. 어쨌든 두 대통령의 결심이 없었다면 한·미 FTA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양측 협상단 간에는 치열한 논쟁과 다툼이 있었지만, 상대를 속이거나 고의로 곤경에 빠트리는 계략은 쓰지 않았다. 지금도 당시 상대역이었던 웬디 커틀러 여사에 대해서는 같이 일해서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개인적 평을 마음에 담고 있다.

근년 미·중 갈등을 신냉전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여기에 더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과 중·러 등의 전제적 권위주의 국가군 간의 대치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통상 분야에서도 규범에 기초한 다자주의가 퇴색하고 자국 이익을 우선하면서 보호주의적 조치가 양산되는 상황이다. 이런 때에 한·미 FTA를 비롯해 그간 우리나라가 맺어 온 FTA망이 우리 무역을 받쳐주는 탄탄한 인프라가 되고 있음은 무척 다행한 일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인도·태평양이라는 전략적 개념과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라는 협력의 틀을 제시했다. 그 안에서 공급망, 기후변화와 팬데믹 대응, 디지털 경제 구축 등 협력 분야를 예시했다. 우리나라는 태평양 연안의 중요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이에 당연히 참여, 협력하면서 상호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 또한, 국제 분업 체계의 고리가 끊기면 공급망의 안정적 확보가 안보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경제외교의 조직과 역량 강화가 긴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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