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혜의 지식카페 - ② 회혼례도 ‘요화노인회근첩’
1848년 치러진 와우산 자락 이학무의 회혼례… 풍산홍씨 집안과 교류했던 둘째 아들 이헌명이 제작
건·곤 두첩으로 첫 장 넘기면 선명한 그림… 祝詩와 더불어 세간살이·조경·건축 등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재미
회혼례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얘기하기로 하고 먼저 화첩을 넘겨보면, 그림 외에는 이학무가 당일의 소감을 읊은 칠언시, 아들 이헌명(李憲明·1797~1861)의 서문, 40편 가까운 참석자들의 축하 시문 등으로 이뤄져 있다. 구성은 여느 사가 기록화 화첩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노란색, 붉은색, 살구색, 파란색, 보라색 등 각각 다른 색종이에 글씨가 쓰인 꾸밈새에서 정성을 많이 들인 화첩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학무의 시는 회혼례가 1848년 2월 28일에 치러졌음을 말해준다. 축시를 남긴 수십 명의 손님 중에는 개화론자로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낸 박규수(朴珪壽·1807~1877)가 문과에 급제한 무렵 비교적 이른 나이에 참석했고, 조선 후기의 걸출한 여항시인 조수삼(趙秀三·1762~1849)과 삼대가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이만용(李晩用·1792~1863)도 포함돼 있다. 나중에 고관을 역임한 젊은 시절의 양반 관료들이 있는가 하면 인적 사항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 사람들도 다수 포함돼 있어 이학무와 이헌명의 교유 범위가 계층을 구분하지 않고 상당히 넓었음을 시사한다.
그림은 회혼례가 거행되고 있는 안채, 손님들이 집결해 있는 사랑채 ‘요화서옥’ ‘요화당’이라는 편액이 걸린 후원 영역의 별채, 그리고 마구간과 중문 밖의 정경까지 이학무 개인의 살림집 구석구석을 한눈에 보여준다(도 2). 회혼례는 화면 왼편의 안채에서 치러지고 있다. 대청에는 모란 병풍을 배경으로 큼지막한 초례상이 마련돼 있고 이학무는 오른편에, 부인은 왼편에 앉아 있다. 부인이 더 크게 그려진 것은 이학무보다 나이가 많았음을 나타낸다. 의례의 진행을 돕는 가족 중의 누군가가 술잔을 이학무에게 전해주는 정황이 묘사된 것을 보면, 노부부가 교배례를 마친 뒤 술을 나눠 마시는 합근례 순서가 표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회혼례도의 대표 도상은 노부부가 마주 서서 절을 하는 교배례 장면임을 상기하면 이 화첩에 합근례 순서가 그려진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아마 회혼례도 중에서 합근례를 묘사한 그림으로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 한다.
초례상 주변에 마련된 촉대와 술병, 술잔 등 기물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옥동자 한 쌍이다. 향좌아라고 부르는 다리가 긴 탁자 위에 놓인 옥동자는 옥각동자, 옥각동인, 향동자 등의 별칭으로도 불렸는데 옥을 어린아이 모양으로 조각해 향꽂이로 사용하던 것이다. 득남과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상징을 담은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 오른편에 있는 사랑채에는 방마다 손님들이 가득하다. 마당에 대형 차일을 치고 근사한 수묵산수화 병풍을 둘러 조성한 연석에도 이미 자리 잡은 손님들로 만석이다. 손님들은 각자 독상 앞에 좌정하고 중앙에는 국자가 꽂힌 큰 술동이도 준비돼 있다. 차일 기둥 옆의 상 위에는 이 화첩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을 미리 말해주기라도 하듯 종이 두루마리 꾸러미가 잔뜩 쌓여 있다.
초가지붕을 얹은 요화당은 사랑채 뒤쪽에 조그맣게 배치돼 있는데 둥근 창 안으로 서책이 가득 엿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학무가 주로 서실로 사용했던 것 같다. 바름벽에 난 아치형 문을 통해 안채 혹은 사랑채와 연결돼 있으며, 쌍여닫이 덧창과 미닫이창의 창살은 꽤 장식적이다. 요화당 앞뜰에는 한 그루 벽오동과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뒤편으로는 큰 돌을 쌓아 만든 축대 위에 주인의 원예 취미를 암시하듯 괴석과 화초 화분도 보인다. 그 외에도 노신부가 거처하는 안채 온돌방 안의 곰방대와 호롱 등잔, 마당의 오리와 강아지, 중문 밖의 하마석과 우물, 마구간 등에서 민가의 구조와 세간살이, 조경, 건축 의장의 세부를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이학무는 본관이 평창이며 한미한 무반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학무에 대한 정보는 뜻밖에도 당대의 문한세가 풍산홍씨의 일원인 홍길주(洪吉周·1786~1841)의 글에서 발견된다. 홍길주와 이학무 집안과의 연결 고리는 ‘요화노인회근첩’의 제작을 주도한 둘째 아들 이헌명이다. 이헌명은 홍석주·홍길주 형제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홍석주를 따라 감영에서 함께 생활했을 뿐 아니라 홍석주를 따라 북경을 다녀오기도 했다. 과거에는 그다지 뜻이 없었는지 부친의 회혼례를 치르고 4년 후인 1852년 5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입격했다. 홍석주 형제는 이헌명을 ‘우리 집안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아꼈으며 이헌명은 홍석주 형제의 자제들과도 깊이 교유했다.
부친 이학무는 부귀에 욕심이 없고 워낙 소박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와우산 아래 서강 근처의 작은 집에 살면서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물고기와 새를 벗 삼아 꽃을 심고 물 주는 일을 평생의 즐거움으로 여겼다. ‘꽃에 물을 준다’라는 뜻의 당호는 이러한 이학무의 생활상과 꼭 맞는 이름이다. 그림에서도 요화당이 있는 별채 영역은 꽃과 책을 곁에 두고 한적한 삶을 즐겼던 이학무의 문인 취향을 물씬 느끼게 해준다.
그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부터 시 짓는 것을 좋아해 자신의 시를 모은 ‘요화시고’를 편찬할 정도였다. 여항시인들의 시를 모은 ‘풍요삼선’에서도 그의 시를 찾아볼 수 있는데 손님으로 초대된 조수삼은 선배 여항시인으로서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가난하지만 독서하며 문장에 전념하는 오래된 가풍은 이학무의 증조부로부터 아들에 이르기까지 5대가 문집을 남긴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헌명의 재능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며 각별한 관계를 맺어 온 홍길주는 이학무의 ‘요화시고’에 서문을 쓰고 그의 집에 ‘요화당기’를 지어주기도 했다.
사가에서 행사를 마친 뒤, 연석에서 창출된 시문으로 시첩을 엮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요화노인회근첩’처럼 기록화를 첨가해 화첩을 만드는 일은 행사를 치렀다고 누구나 쉽게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사가기록화의 주인공이 이학무처럼 평범한 집안 출신인 경우는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요화노인회근첩’은 이런 면에서 특별한 존재다.
이헌명은 홍석주 형제는 물론 그의 자제들과도 가깝게 왕래하며 풍산홍씨 집안에 수장된 풍부한 서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서화를 향유하는 방식과 활용 가치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풍산홍씨 집안에 내려온 사가기록화의 제작 사례는 물론 18세기 이래 지체 높은 경화사족들의 사가기록화 제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고 여겨지는 이헌명은 부모의 회혼례를 맞아 잘 만들어진 화첩을 선사해 드리고 집안에 기념물로 남기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요화노인회근첩’은 가전의 보물을 넘어 온 국민이 향유하는 국외 소재의 한국문화재로서 위상을 가졌으니 이헌명은 부친의 회혼례를 대대손손 영원히 기념하고자 했던 소망을 충분히 이룬 셈이다.
미술사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바이네케 도서관
희귀본과 육필본 기록물 컬렉션으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도서관으로 19세기 중반 비유럽어로 된 도서들을 최초로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 컬렉션의 기초가 됐다. 널리 알려진 구텐베르크 성경을 소장하고 있는 이 도서관은 예일 동문인 바이네케 삼 형제의 후원으로 1963년에 개관했다. 한국 컬렉션은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과 유럽의 서적상을 통해 1915년부터 수집되기 시작했으며, 후에 예일일본협회가 소장했던 자료 44종 70책이 기증돼 소장자료가 두 배로 늘어났다. 이 ‘요화노인회근첩’도 원래는 예일일본협회의 소장본이었다. 한국 컬렉션은 200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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