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현 작가가 지난 21일 일산 자택의 전시실에서 “한 작품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 길을 걸으려고 애써왔다”고 했다. 배경 그림은 ‘접합’ 시리즈의 1995년 작품(왼쪽)과 2021년 근작.
하종현 작가가 지난 21일 일산 자택의 전시실에서 “한 작품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 길을 걸으려고 애써왔다”고 했다. 배경 그림은 ‘접합’ 시리즈의 1995년 작품(왼쪽)과 2021년 근작.

■ M 인터뷰 - 한국 단색화 세계 알린 하종현 작가

1960년대 가난한 젊은 작가 시절
원조식량 담던 마대에 그림 그려
물감 뒤에서 밀어내는 방법 고안

우리 미술계 전위적 양식 전파
‘접합’ ‘이후 접합’ 시리즈 선봬

수십년간 마대와 씨름 지쳤지만
화가는 그림 그리다가 전사해야
‘하종현 미술관’ 무산 아쉬움 남아
공공 미술관에 공간 마련됐으면


“내 작품은 마대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내서 만드는 것이니 힘이 듭니다. 그걸 수십 년 했으니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그래도 잠시 쉬면 작업을 하고 싶어서 다시 나옵니다. 군인이 전쟁에 임하는 자세로 화가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전사해야 하니까요.”

올해 86세의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청년처럼 뜨거운 음성이었다. 하종현 작가. 한국 단색화를 세계에 알린 미술계 거장이다.

지난 21일 경기 고양시 일산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아파트촌 옆 들판에 자리하고 있는데, 한 울타리 안에 창고 4동이 함께 있다. “창고는 작업실과 수장고로 1개씩 쓰고 있고요, 전시실이 2개에요. 그 옆에 집과 서재가 있지요.” 하 작가의 딸인 하혜리(52)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혜리 씨는 판화작가다.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공부하고, 홍익대 미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대학에서 강의하며 작품 활동을 하다가 아버지 일을 돕고 있다. 노 작가를 대신해 작품 관리와 대외 업무가 필요해서다.

하 작가는 전시실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자신의 작품들을 가리켰다. “저렇게 큰 것들을 주로 그리니 팔리지 않았어요. 사서 아파트에 걸 수 없는 작품들이잖아요. 그래도 죽어라 그림을 그렸지요.”

그는 미술사에서 한국적 추상의 개척자로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잘 팔리는 작가는 아니었다. 그는 그 이유를 “한 종류의 그림이 유명해져서 팔릴 만하면 금세 다른 작품세계로 가 버렸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풀이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비정형 추상회화인 앵포르멜(Informel) 경향 작업의 선구자였다. 1969년에 창립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주축으로서 우리 미술계에 전위적 실험을 전파했다. 1974년부터는 올이 굵은 마대 뒷면에서 물감을 천의 앞면으로 밀어 넣는 배압(背壓) 기법을 통해 ‘접합(Conjunction)’ 연작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작업 방식은 그만의 조형 언어로 자리 잡으며 성가를 높였다. 그가 박서보, 정상화 작가 등과 한국 단색화 거장으로 해외에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이 ‘접합’ 시리즈 덕분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단색이 아닌 다채색의 ‘접합’ 작품을 시도했다. 또한 나무 합판을 자른 조각들을 먹이나 물감을 칠한 캔버스 천으로 감싼 후 그 재료의 흔적이 나무 조각 사이로 스며 나오게 하는 ‘이후 접합(Post-Conjunction)’ 시리즈를 내놓고 있다. 화면의 율동감을 다채롭게 변주하는 실험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가 전속 화랑인 국제갤러리에서 지난달 15일부터 한 달 동안 펼친 개인전은 그런 역정을 담았다. 전시장에 가보니 코로나바이러스 오미크론 확산 기간인데도 관람객이 많았다. 그의 작품 마니아로 보이는 중장년뿐만 아니라 젊은 남녀들이 줄을 이었다.

하종현 작가가 지난 2012년 회고전 때 찍은 사진 앞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종현 작가가 지난 2012년 회고전 때 찍은 사진 앞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들 좋아해 주시니까 저로선 만족스럽지요. 작가로서 그 이상 욕심부리지 않습니다.”

그는 근년에 국내 아트페어와 경매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반열에 올랐다. 그의 작품을 한 점이라도 사는 것이 그림 애호가들의 꿈이 됐다. 그로서는 격세지감이다. 국내외 유명 뮤지엄들이 그의 작품을 앞다퉈 구입하고 있다. 해외 전시에도 꾸준히 초대받고 있다. 미술 올림픽이라 불리는 베네치아비엔날레의 올해 병행 전시로 그의 개인전이 4개월간(4월 23일∼8월 24일) 열릴 예정이다.

세계적 거장이 돼 구순을 바라보는 그는 “청년기에 겪었던 전쟁의 아픔에 평생 시달렸다”고 되돌아봤다. 그러나 그 아픔을 넘어 평화 메시지를 주는 작품을 만들어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1960∼1970년대에 철조망, 용수철을 캔버스에 붙인 작업이 대표적이라고 했다. 평면을 입체화하는 형식으로 시대의 아픔을 녹여낸 작품들을 전시실에서 볼 수 있었다. 그의 작업을 곁에서 지켜봐 온 부인 박미자(78) 씨는 “민중미술을 가장 먼저 시작한 셈”이라고 했다. 순수 추상미술의 대가에게 민중미술 시기가 있다는 해석은 흥미로웠다.

하 작가의 브랜드인 ‘접합’ 시리즈를 낳게 한 마대는 전후에 나라 전체가 겪었던 가난과 관련이 있다. 1960년대에 젊은 작가였던 그가 캔버스를 살 돈이 없어서 원조 식량을 담았던 마대에 그림을 그린 것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마대에 그림을 그리기가 어려워서 물감을 뒤에서 밀어내는 방법을 생각했고, 그것이 예술적 변이를 일으키도록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25세 때 여덟 살 연상의 하 작가를 만나 결혼한 박 씨는 평생의 반려이자 작업 동지다. 부부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국제갤러리의 한 직원은 이렇게 귀띔했다. “하쌤(선생님) 작품은 엄청나게 많은 물감의 혼합이 필요한데, 지금은 기계를 활용하지만 그 이전엔 박쌤이 손으로 직접 반죽했다고 합니다.”

박 씨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화가와 살면서 한 번도 작품을 팔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림을 그리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만 살면 됐지, 팔리는 작가가 되기를 바란 적이 없어요.” 그것은 고교 미술교사였던 박 씨가 화가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해서였다. 또한 하 작가가 30여 년 홍익대 교수를 하며 생활인으로서의 성실을 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 작가는 “내가 팔리지 않는 그림만 그리는 바람에 아내 주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식구들이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는 월급은 벌어다 줬다”며 웃었다.

그는 대학 재직 때 젊은 제자들과 그룹전을 함께할 정도로 가깝게 어울렸다. 이두식, 김태호, 이배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그는 교수직을 퇴임하면서 그 퇴직금으로 ‘하종현 미술상’을 만들어 후학들을 격려하고 있다. “아내에게 금반지 같은 걸 만드는 데 쓰라고 줬어요. 그런데 그러지 않고 그게 내게 다시 돌아왔어요. 그래서….”

질박한 그의 말투에서 해학이 느껴졌다. 그는 사진 기자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 “어디서 이만한 작가 못 보셨지요? 시원찮은 작가가 많잖아요”라며 웃음을 자아냈다. 딸 혜리 씨가 웃음을 머금고 “평소 가족들과 있으면서도 유머를 즐기신다”고 했다. 아내 박 씨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분위기 메이커라고 하더라”며 미소를 지었다. 하 작가는 “술을 좋아해서 엄청나게 마셨는데, 지금은 절주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미술 단체장, 기관장 역할을 한 적도 있다. 한국미술협회장, 서울시립미술관장 등이 그것이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반골 기질의 작가가 어떻게 조직을 이끄는 직책을 맡게 된 것일까. “글쎄, 내가 싫어도 일단 책임을 맡으면 죽어라 열심히 하는 성격이니까….”

그에게 “미술 한류를 확산시키기 위해 우리 작가들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작가들이 아니라 미술 행정가들이 잘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국제 미술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책담당자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미술인들이 해외에 나가보면 여러 가지 벽에 부닥칩니다. 그런 것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작가들이 해외 비엔날레에 가서 세계 미술계 흐름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그런 것 하나가 예술인의 기를 살립니다.”

그를 따라서 전시실 앞에 있는 작업실로 가 보니 역시 각종 화구로 어지러웠다. 유화 물감 냄새도 코를 찔렀다. 그는 캔버스 앞에 놓여 있는 2m 정도 높이의 작업대를 가리키며, “때로 저 위에 올라가 그리니 힘들다”고 했다. 작업실 한쪽에 그의 화풍과 다른 그림이 있는데, 혜리 씨는 “엄마가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제 오빠(하윤·53)도 그림을 그려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의사인데, ‘윤하’라는 필명으로 화가 활동을 하지요.” 그러니까, 가족 모두가 작가인 아트 패밀리인 셈이다.

하 작가는 “남은 욕심이 없는데, 공공 미술관에 내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고 했다. 이는 경기도가 건립을 검토했던 ‘하종현 미술관’에 대한 이야기라고 혜리 씨가 설명했다. “지난 1999년부터 일산 호수공원 뒤쪽에 살았는데 그게 킨텍스 부지로 수용을 당해서 이쪽으로 오게 됐습니다. 그때 후학들이 나서서 미술관 건립을 도에 요청했고, 적극 진행하겠다는 답을 받았지요. 그런데 지방자치단체장이 바뀌면서 없던 일처럼 된 거예요.”

박 씨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 부부의 마지막 소원이에요. 저희가 오래 살아온 일산에 시립미술관이 생기면 거기에 하 작가의 공간이 있었으면 해요. 그래야 이 작품들이 한곳에 모여서 온전히 후대에 전해질 수 있지 않겠어요.”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장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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