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기후협약 국제 흐름 주도
21세기 들어 석유기업들 쇠락
하지만 최근 뉴욕증시서 반전
S&P 수익률 1위가 데번 에너지
우크라 사태 석유·가스 재조명
장기 전망도 석유 수요는 증가
2019년에 개봉된 미국 영화 ‘바이스(Vice)’는 미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된 딕 체니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에는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고,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카터가 백악관 지붕에 설치해 놓았던 태양광 패널이 난폭하게 철거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지구의 기후변화 흐름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를 놓고 견해차를 보이던 정파의 행동 패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진보 좌파 정치인인 카터 대통령이야말로 이미 1970년대부터 화석 에너지를 신재생 에너지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철학을 실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글로벌 산업의 맹주는 석유 기업들이었다. 쉐브론 엑슨모빌 BP 로열더치셸 등은 시가총액으로 대부분 미국 증시의 10위권 안에 꼽혔으며, 그 힘을 바탕으로 국제 정치 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석유 기업들은 일제히 조락(凋落)의 운명을 맞는다. 선진국들은 파리기후협약을 전환점으로 일제히 온실가스 감축을 주요 국정 과제로 내세우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탄소 배출의 주범인 석유와 천연가스는 지구 환경의 파괴범으로 손가락질당해야 했다. 언론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석유의 종말’을 특집으로 꾸몄다. 21세기 들어 뉴욕증시의 시가총액 10위권에 애플 아마존 구글 테슬라 등 빅테크 기업들이 들어선 것만 봐도 권력 무상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럼 석유 기업들은 완전히 무대에서 밀려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요즘 뉴욕증시에서 대박을 터뜨린 종목은 놀랍게도 석유 기업들이다. 특히 셰일가스 생산업체인 데번 에너지는 2021년부터 올해 1월 4일까지 주가가 무려 185%나 폭등했다. S&P지수 종목 가운데 수익률 1위다. 지난해 종반부터 코로나바이러스 퇴조에 때맞춘 산업 생산의 부활과 공급 부족 여파로 유가가 상승한 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석유와 천연가스 등 기름에 ‘기름’을 부었다. 그런데도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증산을 거부한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종식된다 해도 고유가 흐름이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는 이유다. 이런 고유가 추세를 반영하듯 데번 에너지의 주가는 올 들어 28% 추가 상승할 것이라고 한다.
지금으로써는 석유·천연가스 시장이 역사의 무대 뒤로 밀려나리라는 예측은 성급하다. 21세기 들어 글로벌 정치는 기후변화 대응, 신재생 에너지라는 명분과 당위성, 이상주의의 액셀만을 밟고 있었다.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조차 실제 수급 균형은 따져보지도 않은 채 셰일가스 산업을 규제했고, 기존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기업들을 무자비하게 압박하며 신규 투자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지금의 천문학적 인플레이션 현상의 가장 큰 동력을 제공한 것은 바로 바이든 미 행정부다.
장기적으로 석유·천연가스 소비가 증가할 것으로 보는 또 하나의 이유로 세계의 인구 동태가 꼽힌다. 에너지 전문가들에 따르면, 식량을 제외한다면 다른 어떤 상품보다 석유 소비가 인구와 가장 큰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유엔 인구전망에 따르면, 세계 인구는 2019년 기준 77억 명에서 2057년에 100억 명을 돌파한다. 여기서 중요한 경제법칙이 등장한다. 2000년 이후 인구가 연평균 1.2% 늘어날 때마다 같은 기간 원유 소비량은 1.3%씩 증가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역시 최근 세계 에너지 전망 보고서를 통해 2050년 석유 수요는 2020년 대비 17%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글로벌 석유 소비의 60%는 중국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기타 개도국들이다. 선진국들끼리 아무리 애를 써도 이들 나라의 화석 에너지 소비는 감소할 수 없는 구조다.
기후변화에 대한 지구적 대응과 환경보호의 당위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선진 각국의 탄소 제로 정책으로 자동차와 발전 부문에서의 석유·천연가스 수요가 점차 준다 해도 석유화학, 항공, 선박, 군수산업 등의 화석 에너지 수요까지 억제할 수는 없다. 신재생 풍력 에너지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쏘아 올릴 수는 없지 않은가. 눈은 하늘을 향해도 발은 땅을 딛고 설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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