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 ‘능호관 이인상 연보’ 출간
세종대왕 열셋째 아들의 후손
166년걸친 관련 사적 등 기록
시문·편지글 등 다각적 검토
실존과 내면 풍경까지 기술
도가사상·평등 감수성 밝혀내

한 인물에 대한 충실한 연보는 문학이나 역사, 사상사 연구의 초석이 된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근대 이후에도 ‘연보학’이 하나의 분과로 탄탄하게 자리 잡았으나, 한국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고려 시대에 이규보와 민사평, 이곡, 이색 등의 간략한 연보가 이들이 쓴 책에 첨부됐고 조선 시대에는 이언적, 이황, 송시열 등의 연보가 비교적 방대하게 쓰였으나, 최근에는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다.
이런 점에서, 박희병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가 최근 새롭게 내놓은 ‘능호관 이인상 연보’(돌베개)는 “한국 연보학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출판사의 자평만큼이나 반갑게 다가오는 책이다. 이인상(1710~1760)은 18세기에 다방면으로 활동한 시인이자 산문가, 화가, 서예가다. 또한 그는 사상과 이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당대의 문제적 지식인이다.
박 교수는 1710년(숙종 36년) 4월 26일 이인상이 서울 남산에서 세종대왕의 열셋째 아들 이침의 후손이자 서얼로 태어난 때부터 죽은 지 116년이 지난 1876년(고종 13년) 박규수가 ‘능호 그림의 족자에 적다’라는 글을 쓰기까지, 166년에 걸친 이인상 관련 사적을 촘촘하게 기록했다. ‘연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서설부터 ‘찾아보기’까지 합하면 총 586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책이 이렇게까지 두꺼워진 이유는 단지 박 교수가 2016년 이인상의 ‘능호집’을 번역하고 2018년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을 출간하는 등 20년 넘게 이인상을 파고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연보학의 성과를 이어받으면서도 새로운 연보학의 길을 제시하겠다는 저자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관념에서 연보는 완결된 독자적 저술이라기보다는 본격적인 작업을 위한 징검다리로 여겨져 왔지만, 박 교수는 이런 관념은 타파돼야 한다고 말한다. “연보는 그 자체로서도 한 인간에 대한 독특한 방식의 글쓰기다. 연보는 단지 보조적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이며 독특한 ‘인간학’적 보고이며, 지적 건축물에 해당한다.”
박 교수는 인물의 외적 행위에 주안점을 둔 기존 연보들과 달리 이번 책에서 이인상의 ‘실존’과 ‘내면 풍경’까지도 기술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인상의 연대기에 한정하지 않고 그 주변 인물들, 이른바 ‘단호 그룹’에 속한 인물들까지 따라가며 18세기 전·중기 조선의 시대정신(Zeitgeist)을 탐색하고, 나아가 이 시기 동아시아의 추이도 살폈다. 이인상이 남긴 시와 산문뿐 아니라 그가 주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까지 광범위하게 검토했다. 그 결과 이인상은 기존의 숭명배청(崇明排淸) 이미지를 넘어 도가(道家)의 사상과 평등의 감수성까지 갖춘 인물로 재구성됐다. 아내의 지적 능력을 존경하고 집안 여인들을 존중한 이인상의 면모도 드러났다.
철저한 사실 확인 없이는 단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게 연보의 특성이다. 한국학에서 연보가 홀대당한 이유도 연보를 쓰는 것만큼 까다로운 작업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인문학 학문력의 약화를 우려하는 박 교수의 목소리는 후학을 향한 당부와 독려로 들린다.
“학문의 힘을 학문력이라고 하듯 예능의 힘을 예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지금 한국의 예능력은 누가 보더라도 엄청나다고 하지 않을까. 그와 달리 학문력, 특히 인문학의 학문력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좋지 않은 징후로 느껴진다.”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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