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계 트렌드 변화… 시대가 품은 고민을 읽다
2010년대 중반 휩쓸던 ‘힐링열풍’
각박한 경쟁사회 속 내 삶에 초점
2020년대 들어‘팬데믹 장기화’로
고립·단절에 ‘관계맺기’ 열망 커져
타인 혐오·진영 갈등 심해지면서
관용·연대 다룬 책들 출간 잇따라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내가 행복해지는 과정은 곧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이다.”(2016년, ‘자존감 수업’ 중)
“타인의 신발을 신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위한 일이다. 이타적이 되면 이기적이 된다.”(2022년,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중)
‘나’에서 ‘타인’으로, ‘자존감’에서 ‘배려’로, ‘위로’에서 ‘공감’으로. 최근 들어 출판 시장의 트렌드가 눈에 띄게 변하고 있다. 2010년대 중반 ‘힐링 열풍’을 일으킨 ‘미움받을 용기’(인플루엔셜),
‘자존감 수업’(심플라이프) 등이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 삶’을 주체적으로 꾸리는 방법에 초점을 맞췄다면, 최근엔 ‘타인이라는 가능성’(어크로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은행나무), ‘프렌즈’(어크로스), ‘다정함의 과학’(더퀘스트)처럼 공감·타인·우정·연대를 키워드로 내세운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다른 사람을 혐오하고, 진영에 따라 분열하는 분위기가 이어지면 사회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출판 트렌드에 반영된 것이라고 진단한다. 한국 사회가 관용과 연대를 중시하며 성숙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팬데믹 장기화로 인한 고립과 단절의 시대에 ‘관계 맺기’에 대한 열망이라는 설명도 있다.
◇“나를 돌보고 가꿔라”…2010년대 중반 ‘힐링 에세이’
2015~2016년 무렵 베스트셀러에 오른 에세이들은 각박한 속도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 타인과의 비교로 열등감에 사로잡힌 이들을 향해 ‘나’를 챙기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100만 부 이상 팔린 ‘자존감 수업’은 자존감의 3대 축으로 자기 효능감, 자기 조절감, 자기 안전감을 지목한다. 저자인 윤홍균 정신과 전문의는 ‘N포 세대’라는 용어가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 사회 분위기를 대변한다며 “자존감은 행복의 결과이기도 하고, 자존감의 결과가 행복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자존감이 ‘정신 건강의 척도’라는 저자는 우선 ‘남’이 아닌 ‘나’를 사랑할 것을 주문한다. “자신을 사랑하면 인생이 심플해진다. 혼자 길을 걸어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하는 느낌이 들고, 외로움이 느껴져도 많이 괴롭지 않다. 인생을 조금 편하게 살고 싶으면 평소 자신에게 ‘괜찮아’라는 말을 자주 해줘야 한다.”
심리학 거장 알프레트 아들러의 이론으로 ‘용기의 철학’을 설파한 ‘미움받을 용기’는 타인의 칭찬을 갈망하는 ‘인정 욕구’를 과감히 포기하라고 조언한다. 남의 이목에 신경 쓰느라 현재의 행복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 권위자인 기시미 이치로(岸見一 郞)는 “사람의 고민은 모두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며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길 원하는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타인에게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야만 비로소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출간된 ‘나에게 고맙다’(북로망스) 역시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힐링 에세이다. 책큐레이션 플랫폼 ‘책 읽어주는 남자’ 편집장 전승환 작가의 데뷔작으로 최근 ‘30만 부 기념 개정판’이 나왔다. 저자는 “네 잘못이 아니야. 조금 늦어도 괜찮아. 수고했어, 오늘도. 이미 넌 충분해. 이 모든 말들은 나에게 먼저 해줬어야 한다”고 위로한다. 박경란 심플라이프 대표는 ‘나를 향한 위로’가 트렌드로 부상한 당시 분위기에 대해 “입시·취업 등 치열한 경쟁 속 ‘번아웃’에 이른 독자들이 ‘건강한 개인주의’에 눈뜨면서 자존감에 관한 책들이 큰 호응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공감’으로 혐오와 분열의 시대 넘자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 서점가를 장악한 책들의 키워드는 바뀌었다. 혐오의 시대를 넘어서는 해법으로 ‘위로’가 아닌 ‘공감’, ‘나’가 아닌 ‘타인’을 강조하는 책들이 연이어 독자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출간된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는 약자를 연민하는 ‘심퍼시(sympathy)’가 아닌 타인의 입장에 서보는 ‘엠퍼시(empathy)’를 제안한다. 대상을 ‘가엽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한정하는 심퍼시는 ‘본능적 감정’에 가깝지만, 제한 없이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엠퍼시는 인지적 훈련이 필요한 ‘지적 작업’이다. 일본 태생의 영국 작가 브래디 미카코는 특정 집단에 ‘소속된’ 감각에서 자유로운 엠퍼시야말로 ‘친구 vs 적’ 구도를 넘어서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여행하는 철학자 윌 버킹엄의 ‘타인이라는 가능성’은 불신과 외로움의 고리를 끊는 공동체에 주목한다. 낯선 이들과 만찬을 즐긴 흔적이 남은 네안데르탈인 화덕 터 등 다양한 ‘환대의 역사’를 살피며 “타자와의 관계가 곧 미래와의 관계”라고 적는다.
지난해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디플롯)의 성공 이후 다정한 친화력과 유대감이 진화의 원동력임을 보여주는 책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올해 초 출간된 ‘다정함의 과학’은 다정함이 사라진 환경이 건강을 악화시킨다는 것을 데이터로 증명한다. 세계적 진화인류학자 로빈 던바의 ‘프렌즈’는 ‘우정의 동심원’ 개념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치를 규명하며 “사교 활동 수치는 인간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반면 사회적 고립은 사망 확률을 30%나 높인다”고 주장한다. 최윤경 어크로스 편집장은 “던바는 마음에 안 들면 관계를 바로 차단하는 ‘SNS 소통’을 우려하는데 이는 ‘프렌즈’뿐 아니라 공감을 다룬 최근 도서에 공통으로 담긴 메시지”라며 “자신에게만 몰두하느라 타인을 배척하면 사회 전체가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에서는 ‘나를 돌보고 가꾸라’고 말한 책에 대한 수요가 사라졌다기보다는 부동산·주식 등 보다 직접적인 투자지침서로 이동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존감 수업’이나 ‘미움받을 용기’는 각자 능력으로 생존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내면을 단단히 해야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면서 “갈수록 한국이 ‘돈’을 중시하는 사회로 바뀌면서 젊은 독자들이 ‘내면’보다 ‘물적 토대’를 튼튼히 갖추는 가르침에 귀 기울이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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