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님은 갔습니다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빙벽(氷壁)을 뚫고 찾아오는 봄을 기다리던 지난 2월 마지막 토요일 26일 오후, 이어령 선생님께서 작고하셨다는 부음을 받고, 나는 외로운 절망감으로 시야가 흐려짐을 느꼈다. 지난 연말 푸른 잎새 속에 붉은 열매가 맺혀 있는 동백 화분을 보시고 생명이 결실을 이뤘다고 말씀하시며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셨지만, 선생님의 목소리가 맑고 투명해서, 마지막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선생님께서는 삶과 죽음은 손등과 손바닥 사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 먼 길’을 동행자 없이 어떻게 홀로 먼저 떠나셨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생전에 선생님께서는 ‘동행’이란 어휘를 사용하시며, “나를 떠나지 않고 함께해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마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내가 드릴 말씀을 선생님께서 먼저 하셨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문학의 숲’에 대한 나의 관심과 욕망을 인지하시고 50년 가까이 함께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영문학 전공자였지만, 모국어의 아름다움에 목말라 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문학사상’을 통해 우리 문학의 세계로 입문하게 해 주셨다. 1976년 봄 시인 김승희와 함께 관철동 잡지사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일은 하나의 큰 놀라움이었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현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다”고 말했듯이, 나는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문학에 대한 지평을 넓힐 수 있었음은 물론 실제 ‘문학의 숲’에 접근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공허함을 느낄 때마다 나는 경복궁 앞 적선동 골목에 있던 ‘문학사상’ 사랑방을 찾았다. 그때마다 나는 이광수 초상화를 등지고 앉아 작가와 시인들에게 하셨던 선생님의 담론을 함께 들으며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아포리즘 가득한 선생님의 지적 담론은 문자가 아닌 육성으로 이뤄졌지만,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 프루스트가 베르고트의 작품 속에서 특히 좋아했다는 ‘썰물 같은 선율과 고풍스러운 표현, 그리고 매우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표현들’ 같았다. 그때 나에게 선생님의 말씀은 영국의 저명한 평론가 새뮤얼 존슨을 연상시킬 만큼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가득 찬 미학이었다.
어느 측면에서 보나 선생님의 문학은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는 인간에 관한 문학 그 자체였다. 선생님께서 이화여대를 떠나며 하신 소크라테스의 독배(毒盃)에 관한 마지막 강의를 시작으로, 생의 후반에 와서 그리스 문화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시며 인류학과 기호학을 중심으로 생명과 삶의 구조 및 그 현상을 탐색하는 문화비평의 글을 쓰시게 된 것도 근원적인 문제에 관한 미학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고단한 삶의 먼 길을 동행하시면서 내게 베풀어 주신 숨은 사랑도 적지 않았다. 1978∼1979년, 내가 하버드대에 머물고 있었을 때, 오영수의 ‘특질고(特質考)’ 사건으로 괴로운 심정을 나타내며 흐린 글씨로 쓰신 항공우편 편지를 보내주셨던 일, ‘문학사상’을 그만두고 성미산 기슭에 있는 나의 집까지 들러 주셨던 일도 있다. 문화부 장관직을 끝마치고 웅진출판사에서 어린이 동화를 쓰실 때 가졌던 대담에서는 물론, 어느 해인가 문화일보 창간 기념 대담을 함께했을 때도 무한히 관대하셨다.
5년 넘게 암 투병을 하시며 불안한 고난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단 한 번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의연하고 담대하셨던 선생님! 선생님은 떠나셨지만, 몸소 창립하신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어연구원, 그리고 피땀으로 남기신 변혁(變革)과 아름다운 언어의 보고(寶庫)인 ‘이어령 라이브러리’는 영원히 그 아우라를 발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태동(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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