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생명의노래- 풍죽’, 100×162㎝, 혼합재료에 채색.
김병종, ‘생명의노래- 풍죽’, 100×162㎝, 혼합재료에 채색.


■ 김병종의 시화기행 - (112) 베키오 다리건너 미술관, 우피치

메디치가문 코시모 1세의 사무실
예술가 초빙·작품활동 지원한 공간
1765년부터 일반인에게도 문 열어

‘비너스의 탄생’ 등 작품 다수 보유
카라바조 ‘마성의 천재성’에 충격
‘3D 구현’ 마사토 벽화 만난건 행운


피렌체는 사람 사는 동네의 맛이 나는 도시다. 의(衣), 식(食), 예(藝)가 뒤섞이며 어우러져 있다. 미술관도 시골의 오래된 학교처럼 정겹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열리는 ‘푸드코트’에서는 송로버섯부터 한국형 막국수까지 없는 음식이 없다. 우리네 옛 판자촌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베키오 다리 위의 상점들을 둘러보다가 좌판 같은 노천 식당에서 이탈리아식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는다. 지나치게 짠 것만 제외한다면 혼자 먹기 어려울 만큼 푸짐하다. 가죽 제품을 위해 껍질을 벗겨 낸 고깃덩어리로 만든 티본스테이크와 곱창버거도 있다. 하지만 저녁에는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 근처에 있는 ‘강남 식당’을 찾아볼 작정이다. 이탈리아 여행이 길어지는 만큼 한국의 솔푸드가 필요한 때다.

아르노 강 위의 베키오 다리는 마치 수상가옥 같다. 귀금속이며 가죽 제품을 파는 작은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다리가 처음 세워진 것이 1345년이라는데 무려 천 년 가까이나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강이라고는 해도 한강처럼 폭이 넓고 수량이 많지 않아 마치 청계천의 옛 모습 같은데 이제는 도시의 정겨운 명소가 되고 있다. 문명의 속도가 어지러울 만큼 빨라지면서 동화 속 이야기 마을처럼 옛 모습 그대로 서로의 가난한 어깨를 이어 가며 서 있는 다리 위의 가게들이 크고 번쩍이는 건물들보다 더 정겨워진다. 그리고 이런 정경에 어울리는 미술관 우피치. 건물은 소박하고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아 있지만 그 안의 작품만은 최고의 걸작들로 꾸며진 우피치. 원래 오피스였던 우피치는 그대로 전시관이 되고, 메디치 가문 미술품의 수장고가 됐다.

한나절 동안 우피치를 다 돌아본다는 것은 이 유서 깊은 미술관에 대한 모독일 터다. 그러나 한나절의 시간 드로잉으로 미술관 스케치를 끝내야 하는 것이 여행자의 아쉬움이다. 그 빛들의 방을 돌며 몇몇 걸작을 눈 속에 담아 온다.

#치마부에와 조토

치마부에의 작품들을 실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그림 ‘산타트리니타의 성모’는 성모를 중앙에 배치한 후 좌우로 기하학적 공간 분할을 시도하고 있다. 마치 조선 민화의 책가도 같은 모습이다. 다만 너무 오래돼 완벽한 상태가 아닌 것이 흠. 치마부에 밑에서 자란 제자 조토는 전시실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다. 청출어람인 셈이다. 대체로 중세 미술은 인간의 얼굴에 희로애락의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조토의 성모상은 엷은 미소와 함께 화장한 듯한 얼굴이다. 거기다 가슴도 봉긋해 신(神)의 어머니로서의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그는 종교화에 인간의 감정이 담기는 것을 숨기려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마사토

우피치에서 마사토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전성기인 26세 무렵에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벽화는 마치 3D 영상을 보듯, 3차원의 공간을 소실점 구도 속에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숨겨진 천재는 동료들의 시기 끝에 살해당하고 만다. 그의 나이 27세 때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로마에서였다. 당시 예술계에는 일군의 천재가 한꺼번에 나타났지만 그만큼 시기와 질투, 견제와 모함도 많았던 것 같다. 무림(武林) 같은 예원(藝園)이었던 것.

#보티첼리

아, 드디어 보티첼리의 방에 왔다. 비너스의 탄생(1485년 작). 중세 이후 최초로 그려진 누드화. 실존했던 시모네타 베스푸치라는 여인을 모델로 해 그렸다는데, 화가가 홀로 연모해 마지않던 그녀는 24세의 나이에 죽었단다. 24세라면 단테의 베아트리체가 죽은 나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의 정점에서 져 버린 것이다. 보티첼리는 훗날 자신을 그녀의 무덤에 함께 묻어 달라고까지 했단다. 그런데 이 명화는 내 눈에 어쩐지 어색해 보인다. 목의 꺾임도, 팔 길이도 언밸런스로 보인다. 그러나 미술사적으로는 하나의 전기를 이룬 작품.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는 나무에 템페라와 유채로 그린 작품인데 그가 베로키오의 문하생이던 시절 처음으로 혼자 그려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이 불세출의 전인적 인간은 기계공학과 해부학, 기상학, 군사 무기학, 광물학, 음악, 생물학, 요리 등 거의 전 분야 전 영역에 걸쳐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도대체 당신이 못했던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을 지경이다. 그의 ‘수태고지’는 과학적 시각과 수학적 면 분할 등의 역량이 회화기술의 방편으로 발휘돼 있었다. 이에 반해 미켈란젤로가 역시 나무에 그린 ‘도니 성가족’은 그림에 조각적 볼륨과 동세가 잘 드러나 있다. 성가족의 배경에 그려진 나체 인물상들 또한 그의 조각가적 역량을 내보이고 싶은 욕망의 발로로 보인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그림은 ‘몸’을 가려 버리는 ‘옷’을 못 견뎌 한다.

#그리고 카라바조

그리고 문제적 인물 카라바조의 그림 앞에 선다.

우피치에 걸린 카라바조의 ‘메두사의 머리’는 겨우 지름 55㎝의 둥근 그림이다. 그러나 그 그림이 주는 충격의 파장은 크다.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 흉측한 얼굴에 튀어나온 눈, 그리고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이 모두 뱀으로 돼 있다. 신화에 의하면 메두사의 눈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순간 돌로 변해 버리게 된다는데, 그 메두사의 목을 베어 오라는 명을 받은 페르세우스는 그녀를 직접 보지 않고 방패에 비친 얼굴을 겨누어 그녀의 목을 벤 다음 아테나 여신에게 바친다. 뱀, 죽음, 광기가 이 작은 소품을 채우고 있다. 메두사의 눈을 바라보는 자, 결국 돌이 돼 죽게 된다는데 디자이너 잔니 베르사체는 그 메두사를 브랜드의 로고로 썼다. 그 메두사의 저주 때문이었을까. 여동생 도나텔라와 함께 ‘베르사체 제국’을 일으켰던 그는 마이애미의 저택 앞에서 한 연쇄 살인범의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신화를 카라바조는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 내는데 이 작품이 1595년에서 1598년경 그려진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그 마성의 천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문화 권력이 된 우피치

‘문화 권력’이라는 말이 있다. 정치 권력은 한시적이지만 문화 권력은 그 힘이 길고 오래간다.

우피치는 1572년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에 의해 건축이 결정된다. 그는 행정과 사법 업무를 관장할 새 건물이 필요했고, 이를 화가이자 건축가 그리고 ‘르네상스 예술가 열전’을 쓴 저술가이기도 했던 바사리에게 맡긴다. 예컨대 미술관이 아닌 사무실 즉, 오피스를 신축하도록 한 것(이탈리아어 ‘Uffizi’는 영문의 ‘Office’에 해당한다). 건물은 아르노 강 변에 두 채로 지어졌고 건물과 건물은 좁은 복도를 통해 오가도록 설계됐다. 건축을 완성한 코시모 1세는 선왕들이 했던 것처럼 예술가들을 특별 대접했다. 건물의 1층에는 자신의 집무실을, 2층에는 그들의 작업실을 마련해 주었고, 3층에는 그들이 작업을 끝낸 작품들을 전시하도록 배려했다. 행정 사무실과 이렇게 모인 한 가문의 컬렉션은 1765년 일반인에게 활짝 문을 열게 된다. 사적 소유물이 공적 문화유산이 되는 순간이었다.

권력자는 7분 능선 아래로 다녀야 한다. 자칫 스나이퍼의 사정권 안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조용헌 교수의 말이다. 본래 한미했던 메디치 가문은 양모업 등으로 부를 축적해 피렌체에 은행을 설립하는 등 영향력을 키워 가다가 마침내 15세기경부터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심에 늘 예민했고 국부 코시모 때부터 시민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예컨대 7분 능선을 넘어 스나이퍼의 사정권 안에 잡히지 않으려 애썼던 것이다. 꼭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메디치 가문은 조직적으로 예술가를 후원하고 양성했으며, 이를 가문의 전통으로 삼았다. 자동적으로 예술가의 신분 또한 격상됐으며, 때맞춰 일군의 천재가 쏟아져 나옴으로써 메디치 가문의 기대에 부응했다. 예술, 특히 미술은 자본의 꽃이다. 메디치 가문은 자본의 물을 주어 예술의 꽃이 만발하도록 도왔다. 꽃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저격수는 없다. 한미했던 상인 집안이 수 세기 동안이나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가졌을 뿐 아니라 무려 네 명의 교황까지 배출하게 된 데에는 예술의 힘이 컸다. 그런 의미에서 붓과 끌을 든 메디치 가문의 예술가들은 칼을 찬 무사들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미리 간파했다는 점이야말로 메디치가 가진 위대성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화가, 가천대 석좌교수

우피치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

■ 우피치 미술관은…

미켈란젤로·다빈치·보티첼리 등
200년 걸쳐 모은 컬렉션 2500점


우피치 미술관(Gallerie degli Uffizi)은 피렌체의 예술 명문 메디치 가문에서 200여 년에 걸쳐 수집한 컬렉션으로 꾸며진 미술관이다. 16세기 중반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의 지시로 착공됐으며, 당대의 유명 화가로 미술사가이자 건축가였던 바사리(Giorgio Vasari)가 건축을 맡았다. 1581년에 완공됐으며 메디치가의 공무 집행실로 사용됐다. 두 채의 건물과 회랑으로 이뤄져 있는데 메디치가의 마지막 상속녀 안나 마리아 루이사(Anna Maria Luisa de Medici)의 기증으로 미술관으로 바뀌면서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 작품들부터 렘브란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 작품들로 유명하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의 작품 등 2500여 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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