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 의회의사당 앞 신화 분수에 있는 제우스(왼쪽)와 헤라 조각상. 최근 그리스 로마 신화 해설서를 펴낸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는 ‘불륜의 신’으로 인식되는 제우스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다.
오스트리아 빈 의회의사당 앞 신화 분수에 있는 제우스(왼쪽)와 헤라 조각상. 최근 그리스 로마 신화 해설서를 펴낸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는 ‘불륜의 신’으로 인식되는 제우스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다.

■ 그리스·로마 신화 독창적 해설서 펴낸 김헌 서울대 교수

제우스, 권력 투쟁서 승리한 뒤
이전 지도자들 패인 ‘독재’ 규정
형제들과 통치 영역 나눠 다스려
‘탐욕 경계, 고도의 절제’ 리더십

여러 여성 사이 자식 낳은 것은
핏줄로 연결된 협력자 다수 배출
안정된 정치체제 만들려는 목적

‘미다스의 손=성공’ 인식은 곡해
먹을 것조차 금으로 변해 궁지
파멸적 황금만능주의 향한 경고


“신들의 제왕 제우스를 ‘천하의 호색광’으로만 묘사하는 건 일면적 해석입니다. 권력을 나눈 ‘협치의 달인’이었던 제우스에겐 바람기조차 믿을 만한 협력자를 얻으려는 전략이었습니다.”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을유문화사)는 지난 20년간 서양 고전 연구에 몰두해온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21세기를 사는 한국 철학자’의 시선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재해석한 책이다. 서양 고전에서 길어 올린 질문과 답을 담은 ‘천 년의 수업’으로 유명한 김 교수는 희랍어·라틴어 원전을 토대로 방대한 신화를 개괄한다. 정보를 제공하는 스토리텔링에 치중한 기존 연구서에서 벗어나 적극적 개입을 통해 한국 사회에 유용한 메시지를 뽑아내고,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왜곡된 에피소드를 바로잡는다.

지난 4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서양 학계에서도 보기 드문 새로운 해석”으로 제우스 리더십의 핵심을 설명한 장(章)을 지목했다. 제우스는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뒤 가이아·우라노스·크로노스 등 이전 지도자들이 무너진 원인을 곰곰이 따져본다. 그가 생각한 권력 유지 실패의 원인은 홀로 과실을 누리는 독재적 행태에 있었다. 이에 제우스는 권좌에 오르자마자 힘을 분배하는 작업에 나섰다. 아버지 크로노스에 맞서 함께 싸운 형님과 누님의 공로를 인정해 통치 영역을 나누기로 한 것이다. 올림푸스 산을 거점으로 하는 하늘은 제우스가, 바다는 둘째 형인 포세이돈이, 지하 세계는 첫째 형인 하데스가 다스리는 식이다. 김 교수는 “제우스가 보여준 협업의 기술은 탐욕을 경계하는 고도의 절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이 기술은 폭력적 독재나 중구난방의 무질서를 배제한 정치 체제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4일 서울 관악구 연구실에서 신간을 들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가 현대인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설명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4일 서울 관악구 연구실에서 신간을 들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가 현대인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설명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제우스가 이전 권력자와 구별되는 또 다른 특징은 수많은 여성과 관계하며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제우스는 현대 도덕관념으로 용인하기 힘든 ‘불륜의 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김 교수는 바람기 역시 단순한 성적 욕망이 아니라 핏줄로 연결된 협력자를 다수 배출해 안정된 정치 체제를 구현하려는 전략으로 분석했다. 실제로 제우스는 숱한 여인과의 결합을 통해 미노아 문명을 탄생시킨 미노스, 스파르타 영웅 헤라클레스 등을 낳았다. 그는 여인의 환심을 사 필요한 자식을 얻기 위해서 상대가 호감을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기꺼이 변신했다. 제우스를 무서워하거나 탐탁지 않게 여긴 여성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헤라에겐 뻐꾸기로 변신해 사랑을 이뤘고, 에우로파와 결합하기 위해 황소로 위장했다. “자존심 때문에 훌륭한 상대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요즘 정치인들의 태도는 얼마나 태만한가요. 그리스인들이 제우스를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는 건 위엄과 체면, 권위와 특권을 내려놓은 제우스에게서 이상적 지도자상(像)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성공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미다스의 손’은 견강부회식 해석으로 메시지가 잘못 전달된 대표적 사례다. 프리기아 왕이었던 미다스는 소원을 말하라는 디오니소스에게 “내 몸에 닿는 건 모두 황금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디오니소스의 마법에 미다스가 만지는 흙덩이는 누런 금괴로, 궁전의 벽과 기둥은 거대한 황금 궁전으로 바뀌었다. 명예와 부를 독차지한 미다스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으나 이내 문제가 생겼다. 먹고 마실 빵과 포도주조차 황금으로 변한 것이다. 눈앞의 진수성찬이 그림의 떡으로 바뀌는 걸 본 뒤에야 미다스는 하늘에 구원을 요청했다.

김 교수는 “현대 자본주의의 황금 만능주의는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 숱한 불행을 낳고 있다”며 “세월호 비극이나 가습기 살균제 사건도 사람을 황금 덩어리로 만든 ‘미다스의 재앙’과 다를 바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건강해지려면 미다스의 손을 ‘파멸의 상징’으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야누스를 ‘이중인격자’로 보는 것 역시 원전을 곡해한 해석이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가 기원전 1세기에 쓴 ‘로마의 축제일’은 익히 아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야누스는 헐크나 아수라 백작과 달리 정면과 뒤통수에 얼굴이 있었다. 각각 ‘내디딜 자리’와 ‘지나간 자리’를 응시하는 두 얼굴은 역사를 통찰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와 일맥상통한다. “야누스의 어원인 ‘야누아’는 라틴어로 문(門)을 뜻하는데, 이는 로마인들이 야누스를 ‘안에 있는 사람이 바깥 세계로 나가는 통로(문)의 신’으로 여겼음을 보여줍니다.”

김 교수는 앞으로도 신화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상징적 의미를 캐내 유용한 메시지를 전하는 가이드 역할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신화는 “그저 신기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의 민낯을 비추는 진실의 거울”이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신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곧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나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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