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권 사회부장

선거는 패자가 승복해야 끝나
尹, 집권세력 저항에 부딪혀
‘닥치고 개혁’ 대통령의 숙명

조선 태종 폭군 아닌 창업 군주
기강 세우고 민생 걱정 덜어줘
패가망신 결기로 개혁에 부응


선거는 다득표자가 이겨서 끝나는 게 아니라 패자가 승복해야 끝난다.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임기 말 인사, 탈원전과 부동산 정책 등 정권 인수인계를 놓고 구집권세력의 강한 저항과 반발에 맞서야 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대선은 현재형이다. 구세력을 대표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40% 중반대라는 이례적으로 높은 국정 운영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고, 든든한 팬덤층도 확보하고 있다. 반면, 윤 당선인은 0.73%포인트(24만7077표)라는 역대 최소 득표율 차이로 이긴 데다 ‘국정을 잘 운영할 것’이라는 기대치도 50%대에 불과하다.

윤 당선인이 172석의 더불어민주당을 상대로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를 비롯한 새 정부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를 탈락자 없이 무사 통과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역·연령·젠더에 대한 고려 없이 실력만 보고 뽑았다는 8명의 1차 내각 인선을 보면 불안감이 더 커진다. 6월 1일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은 내부 분열을 막고, 국정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청문회에 매달릴 것이 뻔하다.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이 분열과 갈등을 증폭하는 ‘지옥문’이 될 수 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 이후 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등 4명의 대통령이 진보와 보수 진영을 바꿔가며 집권했지만, 대한민국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기업 덕분에 경제적 삶은 향상됐지만, 양극화와 포퓰리즘, 세대·젠더 갈등, 교육·연금·노동 개혁 지연 등 나라 곳곳이 곪아 있다. 문제를 풀어야 할 정치는 되레 퇴화했다. 3월 대선에서 국회의장, 국무총리, 당 대표 출신 등 기성 정치인이 아니라 중앙 정치 경험이 없는 신인끼리 맞붙은 것은 기존 정치로는 시대 과제를 풀지 못할 것이라는 불신의 증거다.

할 일은 태산인데 윤 당선인을 둘러싼 환경은 첩첩산중이다. 그렇다고 국가 적폐를 내버려 둘 수 없다. 4차 산업혁명 등 대전환기에 ‘국민이 불러내서, 키워 주고 대통령까지 만들어 준’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윤 당선인에게 개혁 대통령은 소명이고 운명이다.

조선 500년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사람은 3대 왕 태종이다. 태종은 ‘왕씨’에서 ‘이씨’로 왕조가 바뀌는 역성혁명을 한 게 아니다. 고려라는 낡은 나라를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로 창업한 리더다. 태종은 새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영, 정몽주, 이색 등 도덕·정치적으로 존경받던 고려 충신들을 척살했고, 왕권 강화를 위해 개국공신 정도전도 쳐냈다. 이복동생도,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에게도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래도 역사는 폭군이 아니라 성공한 개혁 군주로 기록한다. ‘전쟁 걱정 없이 백성은 평화로웠고 물산이 풍부해 전국의 창고가 가득 찼다’는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윤 당선인과 태종은 비슷한 면이 많다. 두 사람은 나라 기강이 무너져 내릴 때 권력을 잡았다. 문 정부 5년간 공정과 상식이라는 규범이 파괴되고 내로남불이 판을 치면서 ‘이건 나라냐’는 아우성이 빗발쳤다. 태종도 권문세족의 수탈과 왜구 침탈, 풍기 문란 등 구체제 악습이 청산되지 않은 혼란의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 미국과 중국이 글로벌 패권 경쟁을 벌이는 것처럼 태종 즉위 때는 국제질서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재편되는 변혁의 시기였다. 태종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기득권 세력을 혁파했듯이 윤 당선인도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을 통해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윤 당선인이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듯이, 태종도 아버지 태조 앞에서 소리 내어 엉엉 울 정도로 눈물이 많았다.

윤 당선인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청년들이 마음껏 뛰는 역동적인 나라, 자유와 창의가 넘치는 혁신의 나라, 약자가 기죽지 않는 따뜻한 나라, 국제사회와 가치를 공유하고 책임을 다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우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전쟁 걱정이 없어야 한다. 그런 나라는 ‘닥치고’ 개혁이어야 가능하다. 윤 당선인은 가뜩이나 약한 정치적 기반을 송두리째 잃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윤 당선인은 지난해 정치 입문을 고민하면서 “패가망신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 결기가 없다면 개혁은 성공하지 못한다. 윤 당선인이 성군인 세종이 아니라 태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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