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환의 음악동네 - 박남정 ‘사랑의 불시착’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뽑는 오디션이 있다면? 최고로 행복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끼리 한자리에 모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천타천으로 서류전형을 통과했지만 각자 무대에 서서 행복을 입증하는 순간부터 째깍째깍 불행의 시한폭탄이 작동할 것 같은 예감도 든다. 백신도 없는 비교바이러스가 경쟁력 아닌 경쟁심 내부로 침투하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이름을 알린(청문회를 통과한) 무명들에겐 기쁨도 있지만 과제도 있다. 박수소리에 묻힌 눈물의 밤은 의외로 짧다. 이젠 지원자들끼리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이 부활시킨 노래의 주인공(현역)들과도 한판승부를 벌여야 한다. 언제까지 남의 노래만 부를 것인가. 찐팬들은 남의 노래가 아니라 ‘님의 노래’를 원한다. 자신만의 오리지널가요를 발표하고 히트시키지 못하면 우리 동네 명가수반열에 반짝(살짝) 머물다 잊히기 십상이다.

불현듯 기억의 주마등이 1980, 1990년대 내가 다니던 여의도방송사 3층 매점으로 이어진다. 그 앞은 직원뿐 아니라 연예인과 매니저들로 늘 붐볐다. 거기서 섭외가 이루어지는 일도 잦았다. 그 당시엔 합창단, 무용단, 관현악단도 직원처럼 회사 안에 상주했다. 거기 CCTV가 달려있었는지는 가물가물한데 오늘 내가 주목하는 사람도 그 매점에서 처음 보았다. 신장은 아담했고 십대처럼 보이는 동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계산대 앞에서도 계산적이지 않을 것 같은 천진한 표정이 특징이었다. 알고 보니 합창단 소속이어서 쇼 화면에서 잡힐 듯 말 듯 변두리에서 병풍역할을 담당해왔는데 어느 순간에 보니 그가 중심에 서서 무대를 휘젓고 있었다. 이른바 작은 거인의 유쾌한 반란이었다.

묘기에 가까운 춤동작과 로봇을 연상시키는 무표정으로 시선을 모았는데 격한 몸놀림에도 가창에 지장을 받지 않는 게 경이로웠다. 알고 보니 이 청년, MBC합창단 이전에 유서 깊은 선명회어린이합창단에서 조율을 거친 실력자였던 거다. 사춘기 시절 ‘별빛 반짝이는 저 하늘아래/ 도시의 가로등 웃음 지을 때’(박남정 ‘널 그리며’ 중) 운명처럼 섬광처럼 다가온 영화 한 편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플래시댄스’였다. 그의 인생에 플래시를 비춰준 음악과 춤, 아이린 카라의 ‘플래시댄스 왓 어 필링’은 수줍던 소년의 세포를 뒤흔들어놓았다. ‘처음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천천히 타오른 꿈 한 조각(First, when there’s nothing/ But a slow glowing dream)이 있었으니 어느 순간에 잠자던 그림이 되살아나고 드디어 자신의 인생을 춤출 수 있게 만들어버린 것이다.(Pictures come alive, you can dance right through your life)

주철환 프로듀서·작가·노래채집가
주철환 프로듀서·작가·노래채집가
박남정(1966년생)이 소환된 건 같은 장소(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58년의 간격을 두고 거행된 ‘세기의 결혼식’(경호원들이 하객들의 청첩장을 일일이 확인하는 절차가 필수) 덕분이다. 1964년 ‘동백아가씨’가 맺어준 신성일·엄앵란 부부에 이어 2022년 ‘사랑의 불시착’이 연결해준 현빈·손예진 커플도 거기서 결혼했다. 마침 내일(4월 19일)이 박남정의 생일이고 ‘플래시댄스’가 미국에서 개봉한 날도 1983년 4월 15일이라 겸사겸사 안부를 전한다. 지난 화요일(4월 12일)에 ‘아침마당’(KBS1TV)에 출연한 걸 봤는데 생각과 표정이 일관되게 해맑아서 보기 좋았다. 행복오디션 우승후보답게 만년 동안의 비결도 공개했다. “집을 천국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는 중입니다.” 물오르던 시절 눈치 안 보고 오로지 노래와 춤에 빠져 사는 그를 보면서 쟨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지’(‘널 그리며’ 중) 모르겠다고 나무라던 선배가 있었는데 사실 그런 이미지는 그가 지닌 놀라운 집중력의 소산이었다. ‘조각조각 부서진 작은 꿈들’(박남정 ‘사랑의 불시착’ 중)이 행복활주로에 정시 도착하는 건 마음먹기 달렸다. 삶은 학예회 비슷하다. 넘쳐서 행복한 게 아니라 채워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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