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공급망 재구축 회오리
韓日 모두 새 활로 모색 시급
시장통합은 훌륭한 대처 방안
韓활력 日기술축적의 시너지
7조 달러 규모 경제단위 출현
국제사회에 강력한 행위 주체
미국 ‘블랙록’은 저평가 대형주를 주로 매입해 장기 투자하는 펀드로 유명하다. 운용 자산만 8조 달러(약 9500조 원)에 달하는 전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다. 블랙록은 지난달 주주 서한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지난 30년간 우리가 경험해온 세계화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다른 나라에 대한 경제 의존도를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기업들은 제조 공장을 자국이나 인근 국가로 옮기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제조 허브로 부상해 수혜를 볼 만한 국가로 미국 멕시코 브라질 동남아 국가를 꼽았다. 한국은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은 오랜 세월 세계화와 자유무역 시스템에서 성공의 법칙을 입증해온 나라다. 세계화가 종지부를 찍고 블록화로 회귀한다면 심각한 피해를 보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더욱 한국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산업구조가 부품·소재의 측면에서 철저히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이 세계 1위를 달리는 스마트폰이나 TV, 반도체 등은 하나같이 일본의 부품·소재와 한국의 조립이 가져온 협력의 결정체다. 물론 이를 역으로 표현하면 일본 산업의 최대 고객 역시 한국이라는 이야기가 성립한다.
한국과 일본은 지금 글로벌 가치 사슬 재구축의 회오리에 빠져든 형국이다. 그럼 이를 헤쳐가면서 경쟁력을 살려갈 묘안은 무엇일까. 프랑스와 독일을 주축으로 한 유럽연합(EU) 방식이 획기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상대방을 믿지 못하는 역사적 앙숙 관계였으나 그렇게 서로를 불신하며 국가를 운영할 바에야 아예 하나로 합치는 것으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기로 했다. 그렇게 양국은 과거를 잊고 하나가 됐다. 한국과 일본 역시 시장 통합으로 서로가 숙명처럼 안고 있는 대립을 해소하고 서로의 장점으로 시너지를 극대화하면 어떨까. 그런 점에서 양국의 시장 통합은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공동 번영과 상생을 위한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런 노력이 가시화한다면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문제, 수출규제 갈등,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등 역사·경제·안보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갈등 구조를 보다 쉽게 해결할 수도 있다. EU에서 보듯 상호 불신을 오히려 통합의 촉매제로 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아직 양자 자유무역협정(FTA)도 체결하지 못했지만, 한국과 일본은 역내에서 드물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다. 내수시장 상호 개방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는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누릴 자격도 갖추고 있다. 2억 명에 근접하는 대단히 균질적인 소비 사회가 탄생할 것이다. 양국 경제를 합하면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7조 달러에 이른다. 한국인은 시장을 개방·확대할수록 더욱 큰 잠재력을 발휘하는 특성이 있다. 일본은 한국의 정보기술(IT)과 젊은 활력을 흡수해 노쇠한 경제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는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스케일 면에서 국제사회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중국이 경제 제재 카드를 휘두른들 이겨낼 수 있는 맷집이다. 미국도 한·일 경제연합의 무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일본 모두에 황금의 기회다.
주변 정세는 익어가고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8일 제6차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에서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참여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입장과 향후 계획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IPEF는 미국이 글로벌 공급망과 기반시설, 디지털 경제, 신재생에너지 등의 분야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아·태 지역의 동맹·파트너들을 규합해 구축 중인 경제 연대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지난해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처음 제안했다. 홍 부총리의 언급은 한국이 사실상 IPEF 참여로 방향을 틀었음을 시사한다. 이 기회를 살려 한국과 일본은 미국에 경제와 안보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한·일 연합에 의지하도록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북핵 위협에 대한 공동 대처 방안이 나올 수도 있다. 이것이 새로운 국가전략이어야 한다. 양국은 더 이상 수직적 분업을 논할 관계가 아니다.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19세기식 구호나 외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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