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기쁨을 반납할 수밖에 없었던 갑갑한 날들이 지나간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코로나19로 바깥 외출이 제한됐을 때 텔레비전을 켜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이 누군가가 ‘걷는 모습’이었다. 봉쇄된 날들의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해 세계 곳곳을 걸어서 여행하는 프로그램들이 재방송됐다. 동네 골목 걷기를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 둘레길을 찾는 산책 프로그램들도 인기였다. 대부분 중년 출연자가 산책자로 등장하며 구수한 입담과 청춘 회상이 내용의 절반을 넘는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들을 위한 산책 이야기는 없을까.
노란 모자를 쓰고 빨간 배낭을 멘, 그림책 ‘걸어요’의 산책자는 정확하지 않지만 청소년처럼 보인다. 잠자리와 나비와 무당벌레의 배웅을 받으며 어느 올레길을 혼자 걷기 시작한다. 그는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 산책자를 만나고 자연스럽게 동행이 된다. 둘은 묵묵하게 걷기만 하는데 우거진 숲이며 징검다리 물길을 지나도 동작이 소란하지 않다. 비를 머금은 구름이 다가오면 멈춰 서서 같은 하늘을 보며 깊은 계곡 출렁다리를 건널 때는 서로 손을 잡기도 한다. 갈림길에서 헤어질 때면 그새 정든 마음이 느껴진다.
글이 거의 없는 책인데 자연의 여러 가지 소리가 그림이 돼 그 자리를 채운다. 책장을 넘길 때면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것 같은 바람도 느껴진다. 태양의 높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오묘한 색감의 차이가 감정을 이끌고 간다. 희고 포근한 상상의 동행 덕분에 내내 안도감이 든다. 걷다가 나의 두 발을 내려다보는 장면에 적힌 ‘뚜벅뚜벅’이라는 네 음절은 매우 적절한 배치다. 이 책의 배경은 제주올레길일 수도, 해파랑길일 수도, 산티아고일 수도 있다. 인생의 비유로 읽히는 장면도 있지만 굳이 그렇게 읽지 않아도 된다. 아무래도 이 책은 읽은 것이 아니라 “책을 걸었다”고 해야 맞겠다. 다 읽고 나서 뒤표지를 펼쳐서 다시 보기 바란다. 비밀 친구는 처음부터 가까이 있었다. 문도연 작가의 첫 그림책이다. 44쪽, 1만5000원.
김지은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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