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뿌연 하늘을 바라보는 한수(이민호)의 이 모습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던 당시 자이니치의 막막한 삶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이 설정은 원작 소설에는 없다.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뿌연 하늘을 바라보는 한수(이민호)의 이 모습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던 당시 자이니치의 막막한 삶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이 설정은 원작 소설에는 없다.

■ 전편 공개된 ‘파친코’… 원작에 없는 이야기 담아 높은 완성도

관동대지진때 터전잃은 일본인
“조선인이 우물에 약탔다” 학살
시대의 아픔속 민족 비극 그려

버림받고 일본땅 건너간 여인
노인돼 고향땅 밟는 설정 넣어
윤여정 “그 장면 있어 잘된 일”

캐나다 매체 “몇년來 최고작품”
美롤링스톤 “원작과 완벽 결합”
日 제외한 전세계가 극찬 세례


“올해의 위대한 드라마가 아니라 지난 몇 년 중 최고다.”

캐나다 매체 글로브 앤드 메일은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애플TV플러스 오리지널 ‘파친코’에 대해 이같이 평했다. 지난달 29일 마지막 회가 공개된 ‘파친코’는 한국인 이민자 4대에 걸친 대서사시를 다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국경과 인종, 민족을 넘어 전 세계에서 설움과 핍박의 역사와 아픔을 지닌 모든 디아스포라(이민자)를 향한 헌사였다. 그렇기에 전 세계가 함께 전율했고, 또 극찬했다. 영국 BBC는 “눈부신 한국의 서사시”라 했고 프랑스 르 피가로는 “올 봄 이보다 더 매력적이고 가슴 아픈 작품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 결과, 애플TV플러스는 ‘파친코’ 시즌2 제작을 확정했다.

◇원작, 그 이상의 가치를 담다

‘파친코’는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 작가의 소설이 원작이다. 이를 두고 미국 롤링스톤은 “원작과 영상의 완벽한 결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역시 한국계 미국인인 코고나다 감독(1∼3화, 7화)과 저스틴 전 감독(4∼6화, 8화)이 나눠서 연출한 ‘파친코’에는 원작에 없는 장면이 다수 담겼다. 그 의도를 이해하면 두 연출자 외에도 테레사 강-로, 수 휴 등 한국계 제작자들이 ‘파친코’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더욱 선명해진다.

총 8부작으로 구성된 ‘파친코’ 중 7부에서 다룬 어린 한수(이민호)의 전사(前史)는 소설에는 없다. 젊은 선자의 삶에 영향을 준 그는 어린 시절 야쿠자의 회계 처리를 돕는 아버지 아래서 자란다. 야쿠자 두목은 셈이 빠르고 똑똑한 한수를 탐낸다. 이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고,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약탈한다”고 헛소문을 내며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고 야쿠자 두목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한수는 결국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야쿠자의 수하로 들어간다. 7부 초반, 링에 오른 일본인 레슬러와 미국 복서의 대결에서 레슬러가 승리하는 장면은 당시 동아시아 패권을 두고 다투던 일본과 미국의 대립 속에서 결국 한수가 동경하던 미국 대신 일본에 주저앉게 된다는 복선이었다. 이는 시대의 아픔 속에서 남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한 인간의 꿈이 얼마나 초라한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수에게 버림받은 후 선교사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선자가 노인이 된 후 부산땅을 밟게 되는 설정 역시 원작과 다르다. 달라진 부산을 생경하게 바라보던 선자가 비 내리는 부산 앞바다에 발을 적시며 울음과 웃음이 한데 섞인 울분을 토하는 장면은 일제 치하 원치 않는 타향살이를 했던 우리 민족의 한(恨)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윤여정은 이 장면에 대해 “그 여자(선자)가 고향에 돌아가 보고 싶지 않겠냐고 생각했는데, 대본을 받았을 때 이 장면이 있어 잘됐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극 중 일제에 저항하는 민초가 ‘뱃놀이’를 부르는 장면도 각색됐다. 당초 원작 소설에서는 홍난파의 ‘봉선화’를 부르는 것으로 묘사됐지만, 노래 발표 시기가 맞지 않고 민족을 대표하는 곡이라 볼 수 없어 변경됐다.


◇땅, 쌀, 그리고 김치

‘파친코’에서 땅은 가장 중요한 모티브다. 선자의 손자인 솔로몬은 자신의 승진을 위해 일본에서 오래된 가택을 지키는 재일 교포 할머니에게 “땅을 팔라”고 한다. “돈을 많이 주는데 왜 안 파냐”는 솔로몬은 내 몸 하나 편히 누일 자리 없던 일본에서 마련한 집 한 칸이, 이 할머니에게는 목숨만큼 소중하다는 걸 알 리 없다. 이 할머니가 내준 밥 한 숟갈을 뜬 노년의 선자는 감격에 겨워 “이거 우리나라서 키운 쌀이다. 그 시절 구경도 몬 한다. 키우기만 우리가 키웠지 죄다 뺏겼으니까. 요런 쌀밥 먹으니 시집가던 날이 생각나네”라고 말한다. 50년 전 시집가던 날 선자의 엄마는 보리가 아닌 쌀을 사 왔다. “쌀은 아무한테 몬 파는 거 알제? 일본 관리가 와서 검사해서”라던 쌀집 주인은 “시집 간 우리 딸내미, 신랑 따라 일본 갑니다. 우리 땅 쌀 맛이라도 뵈주고 싶습니다”라는 선자 엄마의 말에 선뜻 쌀 세 홉을 내줬다. 그러니 노인이 된 선자가 그 쌀 맛을 잊지 못할 수밖에.

이후 오사카로 넘어 온 선자는 남편이 일본 경찰에 잡혀간 후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김치를 팔기 시작한다. 일본인들이 “냄새난다”며 나무라던 그 김치, 그리고 선자가 기억하던 우리쌀은 정(情)이자 한(恨)이자 곡(哭)이었다.

‘파친코’는 일제의 만행을 자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총칼로 맞선 독립군이 아닌, 일상에서 일본과 싸워야 했던 민초가 겪었던 설움과 아픔은 절제된 표현을 통해 오히려 더 선명히 드러난다. 이런 ‘파친코’의 은근하지만 뚜렷한 문제 제기에 외신은 극찬했지만 정작 일본 매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를 두고 영국 가디언은 “일본 주류 사회의 역사 인식과 우익 성향 언론 보도가 문제”라고 꼬집었다.

우리 쌀로 지은 밥을 먹고 먹먹해하던 선자를 보던 재일 교포 할머니는 솔로몬에게 말했다. “할머니 눈물 창피하게 생각하지 마라. 울 자격 있는 분이니까.”

‘파친코’는 그 엄혹한 시절을 묵묵히 버티며 이 땅을 지킨, 또 그리워한 모든 이들을 위한 헌사다. 그래서 제작진은 ‘그들은 견뎌냈다’(They endured)라는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들은 이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안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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