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환의 음악동네 -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노래에도 운명이 있다면 나는 3가지가 궁금하다. 언제까지냐, 어디까지냐, 누구까지냐. 결국은 생명력과 영향력이다. 작업실에서 끝나는 노래도 있고 연습실에서 멈추는 노래도 있다. 사이트에 갇힌 노래도 있고 차트에서 배회하는 노래도 있다. 노래방에서만 활개 치는 노래도 있고 예식장 같은 특정 장소에서 장기체류하는 노래도 있다.
오늘 채집망에 걸린 노래는 기록상으로 15세인데 활동범위가 여전히 종횡무진이다. 음악프로뿐 아니라 뉴스화면에까지 이따금 등장할 정도다. 가깝게는 5월의 캠퍼스에서도 울려 퍼졌다. 놀랍게도 축제가 아니라 시위현장이었다. 대학행정이 미덥지 않던 재학생들이 광장에 모여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라며 절규하는 장면은 묘한 기시감(deja vu)을 주었다.
2020년엔 방콕 시민들이 정권퇴진과 헌법 개정 등을 요구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무대에서 춤추도록 만들어진 곡이 분명한데 왜 집단적으로 절실 절박할 때 거리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됐을까. 이렇듯 경쾌한 멜로디가 어떻게 화살처럼 날아가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을 움직였을까.
일단은 영어제목(Into the New World)이 그들을 끌어당겼을 것이다.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형성할 수 있는 리듬감도 한몫했을 것이다. 무심한 시선, 무료한 걸음을 잠깐 멈추고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자. 어느 지점에선가 우리는 새로움을 잊어버린, 혹은 잃어버린 게 아닐까. 허탈한 마음에 불꽃을 피워준 이 노래의 우리말 제목은 그래서 ‘다시 만난 세계’다.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이 노래로 처음 결집한 소녀시대가 데뷔 15주년을 맞았다. 2007년 당시 이 곡의 인기는 높은 편이 아니었다. 상대진영(박진영) 소속의 원더걸스가 ‘텔 미’로 이미 차트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시 만난 세계’의 원래 주인(될 뻔했던)은 따로 있었다. 제2의 S.E.S.로 불리며 2001년에 데뷔한 4인조 걸 그룹 밀크(M.I.L.K.)가 멤버의 무단이탈로 소란을 겪으며 해체되지 않았더라면 이 노래는 소녀시대와 만나기 어려웠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노래가 시한부 생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시대를 잘 만나(잘못 만나?) 지금의 20대가 합창하는 노래로까지 성장한 것이다. 노래의 운명이란 이런 것이다.
사실은 가수 소녀시대가 탄생하기 전에 노래 ‘소녀시대’가 먼저 존재했다. 핵심노랫말이 무슨 청소년보호캠페인 같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이 노래를 히트시킨 이승철은 한때 소녀 팬들을 몰고 다녔다. 소녀시대 멤버들 중에서도 이승철이 열창할 때 무대 앞에서 열광했을 가능성이 있다. ‘무대 뒤에 그 소녀는 작은 의자에 앉아/ 두 손 곱게 모으고 바라보며 듣네.’(이승철 ‘마지막 콘서트’ 중)
연예계에서 ‘영원한 소녀는 탤런트 정소녀(본명 정애정)밖에 없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조용필 ‘단발머리’ 중) 데뷔 당시 18, 19세였던 소녀시대 멤버들에게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않았지만 팬들은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 보며 기다려줬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이란 부분을 들을 때면 ‘슬픔이여 안녕’으로 데뷔한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오버랩된다. 소설 속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번역 김남주) 그때 사강은 바야흐로 18세였다. 안녕은 만날 때와 헤어질 때 두루 쓰는 인사다. 인생길에서 슬픔을 만나도 ‘안녕하세요’라고 담담하게 인사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주철환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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