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내 최고령이자 최다선인 김진표(75·5선·경기 수원무·사진) 의원이 지난 24일 민주당 의원총회를 거쳐 제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자로 선출됐다. 5선 이상민·조정식 의원과 4선 우상호 의원이 출마해 치열한 4파전으로 진행됐지만, 이변은 없었다. 김 의원은 총 166표 가운데 절반이 넘는 89표를 획득해 우 의원(57표)을 32표 차로 제친 것으로 전해졌다.
당내에선“김 의원은 앞서 제21대 전반기 국회의장 당내 경선 당시 사실상 후반기 국회의장을 맡는 조건으로 박병석(6선) 현 국회의장에게 자리를 양보했었다”며 “이번 국회의장 경선은 인품과 리더십을 두루 갖춘 김 의원의 승리가 예견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민주당이 다수당이기에 이후에는 형식적인 국회 본회의 선출 절차만 남겨 뒀다. 국회의장은 관례에 따라 원내 1당이 맡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친정인 민주당에서 벗어나 ‘균형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국회의장의 면모를 보여 줄 차례다.
◇조율의 대가 ‘미스터 튜너’(Mr. Tuner)=김진표 의원이 2002년 김대중 정부에서 국무조정실장, 그해 참여정부에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치면서 붙은 별명이 바로 미스터 튜너다. ‘조율의 마술사’라는 뜻의 미스터 튜너는 그가 가진 특유의 친화력과 경중·완급 조절에 얼마나 능한지를 단숨에 보여 준다.
김 의원은 2003년 참여정부 당시 경제부총리로 재임하며 재계의 거센 반발과 노동계의 요구 사이에서 탁월한 이해관계 조율로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2012년 민주당 원내대표 시절에는 황우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의 오랜 협의 끝에 오늘날 국회의 근간이 되는 ‘국회선진화법’을 공동으로 대표 발의해 통과시키기도 했다. 특히 오늘날의 여소야대 국면에서 여야가 ‘강대강’ 대치 국면을 이어 가고 있는 점, 향후 중대범죄수사청(가칭) 설치를 위한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출범과 차별금지법 제정 등 갈등을 내포한 입법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는 점에서 후반기 국회의장은 그 누구보다 현안을 원만히 조율해야 할 책무를 안고 있다.
김 의원은 국회의장 경선에 출마하면서 출사표로 “제 몸에는 민주당의 피가 흐른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국회의장은 국회법상 당적을 버리고 ‘무소속 신분’으로 업무를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의원은 “지난 20년간 민주당에서 민주당을 위해 일해 왔으니 당연히 민주당의 철학과 가치를 중시한다”면서도 “삼권분립 민주주의 원칙이 작동하는 국회, 의원이 역량을 펼치는 국회, 그래서 국민 눈높이에서 바라볼 때 민생국회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국회 운영 기조를 설명했다.
이와 함께 김 의원은 ‘삼권분립’에 방점을 찍고 “국회를 ‘통법부’(행정부가 만들어 준 법을 통과시켜 주는 역할만 하는 기관) ‘거수기’로 생각하면 협치가 안 된다”며 “그런 점에서 국회의장으로서 필요할 때 할 말을 꼭 하고, 의장으로서 입장을 밝히는 게 협치를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세 명의 대통령이 김 의원을 모두 중용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며 “차기 국회의장으로서도 그런 면모를 보여 줄 것”이라고 말했다.
◇포용과 뚝심으로 쌓은 5선의 관록=김 의원의 포용력을 가장 잘 보여 준 대목은 자신의 지역구를 박광온 의원(현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에게 물려줬을 때다. 김 의원이 2014년 경기지사 후보로 출마하면서 지역구(경기 수원정)가 공석이 됐고, 그해 보궐선거에서 박 의원이 김 의원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당시 출마한 수도권 후보 중 유일하게 당선됐다. 당시 김 의원은 박 의원의 선거를 본인 선거 뛰듯이 뛰었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도 박 의원을 지지하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정치권에서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맡은 지역구를 후임자에게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일은 흔치 않다. 박 의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김 의원이 본인 선거 뛰듯이 나를 데리고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지역구를 다져 나가는 데 큰 도움을 줬다”며 “김 의원은 나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밝혔다.
김 의원은 2012년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임기를 마치며 당내 대표적 협상파로서 마음고생이 심했던 그간의 소회를 밝혔는데, 자신에게 ‘진표 보살’이란 별칭이 붙은 계기를 설명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원내대표단의 노력이 왜곡되고 비틀어져 SNS상에서 공격적인 비난을 넘어 인신공격까지 받았을 때 억울하고 괴로웠다. 그렇지만 선거를 앞두고 개인이 아니라 협상단 대표로서 당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에 인내심의 한계를 스스로 시험해 보자는 심경으로 참는 노력을 해왔다”고 하며 당 안팎에서 ‘진표 보살’이란 별명으로 불렸다고 말했다. 2011년 김 의원은 여당인 한나라당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단독 처리를 방조하고 타협적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당 안팎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한·미 FTA 발효 10주년을 맞은 올해, 김 의원은 지난 3월 전국경제인연합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수년에 걸친 한·미 FTA 협상·비준 과정에서 난관을 극복한 공로자에게 주는 감사패였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미 FTA 체결로 대미 무역수지 흑자는 2011년 116억 달러에서 2021년 227억 달러로 늘었고, 고용 유발효과도 같은 기간 4만 명에서 9만 명으로 증가했다.
관료 출신인 김 의원은 과거 소탈하고 호탕한 성격으로 폭탄주를 마다치 않는 ‘두주불사’였지만, 지금은 건강을 생각해 술을 자제하고 있다고 한다. 김 의원의 한 측근은 “과거에는 술자리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협상 타결을 많이 이끌어 냈다”며 “이제 고령인 만큼 술을 자제하는 대신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난관을 극복해 내지 않겠냐”고 전망했다. 김 의원의 좌우명은 ‘판단의 기준을 유불리가 아니라 옳고 그름으로 해야 한다. 사람의 예측은 한계가 있어서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후회할 일이 적다’이다. 정치권은 그의 좌우명대로 21대 국회 후반기에는 국회의장이 정치적 유불리가 아니라 여야의 옳고 그름으로 의회주의자의 면모를 보여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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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경기 수원 출생 △경복고, 서울대 법학 학사, 위스콘신대 대학원 공공정책학 석사 △제13회 행정고시 합격 △재정경제부 차관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국무조정실 실장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제17∼21대 국회의원 △민주당 원내대표 △국회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 △한·일의원연맹 회장 △더불어민주당 국가경제자문회의 의장·부동산특별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