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디어 슈베르트’ 21~26일 페스티벌 형태 공연 임동혁·김선욱 등 피아니스트 지난달 ‘후기 소나타’ 등 연주
서정적 음조로 ‘코로나 극복’ 관객에 성찰·공감 무대 선물
길었던 코로나19 겨울잠을 깨고 기지개를 켠 공연장 여기저기서 슈베르트(1797∼1828)의 서정적인 멜로디가 들린다. 5월 임동혁, 김선욱, 윤홍천 등 국내 피아니스트들이 앞다퉈 슈베르트를 꺼내 든 데 이어, 이달엔 아예 슈베르트 음악으로만 6일을 가득 채우는 ‘디어 슈베르트’가 열린다. 연둣빛 새싹이 푸르러지는 길목에서 때아닌 ‘슈베르트 특수’를 누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지금, 슈베르트인가.
평론가들은 다름 아닌 슈베르트 음악, 그 자체에서 답을 찾는다. 어둡고 쓸쓸하지만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고 끝내 희망을 들려주려는 맑은 선율이 코로나19를 툭툭 털어내고 새로운 일상으로 나아가려는 연주자와 관객에게 위로와 위안을 건네고,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과 공감의 시간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는 지난 4∼5일 열린 내한 공연에서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을 대거 꺼내 들었다. 4일엔 슈베르트의 네 개의 즉흥곡 D.935를 연주했고, 5일엔 네 개의 즉흥곡 D.899와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인 21번 D.960을 들려줬다. 앞서 피아니스트 김선욱(5월 15일, 18일)·윤홍천(5월 14일, 20일)·임동혁(5월 24일)도 네 개의 즉흥곡과 후기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했다. 만성기관지염이 악화돼 내한연주가 취소되긴 했지만 ‘명인’ 마우리치오 폴리니 역시 자신의 장기인 쇼팽과 함께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 D.984를 준비했었다.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31세에 요절한 슈베르트가 죽기 1년 전에 만든 후기 작품들에 집중돼 있다. 이 시기는 슈베르트가 사랑에 실패하고, 병마와 싸운 시간이었다. 음악가로 크게 인정받지 못해 인간적으로는 불행했지만 그는 서정적인 멜로디에 고통을 토로하는 진실된 목소리를 담은 음악을 내놨다. 그러다 보니 이 시기의 작품은 슬픔과 기쁨, 좌절과 희망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둡고 쓸쓸하지만,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고 끝내 희망을 읊조리려는 맑은 이미지가 마음을 울린다.
나성인 음악평론가는 “코로나19를 지나며 관객들이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음악을 기다렸는데 슈베르트 음악은 이를 충족하는 음조를 갖고 있다”면서 “슈베르트는 연주자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관객들은 자신을 성찰하는 멈춤의 시간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직전 세대인 베토벤과의 상반된 매력이 슈베르트가 올해 상대적으로 각광받는 요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음악학자 카를 달하우스는 “베토벤의 음악이 목표 의식에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면, 슈베르트의 음악은 기억에 의해 지나간 것을 향한다”고 했다. 2020년 탄생 250주년을 맞아 많이 연주됐던 베토벤의 음악이 코로나19 상황을 딛고 이겨내자는 불굴의 용기를 줬다면 오랜 코로나19 끝에, 하지만 여전히 상황을 예측하기 어려운 지금은 수고했다며 토닥토닥하는 슈베르트의 음악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게 됐다는 얘기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베토벤이 죽고 그다음 해에 슈베르트가 죽었다”며 “베토벤의 250주년 기념해가 지나고 뒤이어 슈베르트가 따라오는 게 자연스럽다는 인상을 준다”고 말했다.
한편 세종문화회관 주최로 오는 21일부터 26일까지 세종체임버홀에서 열리는 ‘디어 슈베르트’는 독주부터 5중주까지 슈베르트의 기악곡과 가곡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 첫 시작을 여는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은 네 개의 즉흥곡 D.899와 ‘악흥의 순간’, 피아노 소나타 18번을 들려준다. 현악 4중주단 노부스 콰르텟과 피아니스트 김대진, 베이시스트 이영수는 현악 4중주 15번과 피아노 5중주 ‘송어’를 연주하고, 성악가 연광철은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선보인다.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는 “베토벤이나 브람스에 비해 슈베르트를 주제로 한 페스티벌 형태의 공연이 국내에 별로 없었다”면서 “10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긴 슈베르트의 음악 세계를 조명해보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31세로 요절할 때까지 600곡 남겨… ‘송어’ ‘마왕’ 등 유명
슈베르트(1797∼1828)는 요즘 시대에 태어났으면 ‘히트곡 제조기’였을 거라고들 한다. 아름다운 멜로디를 숨 쉬듯 뽑아내며 31세에 눈을 감기 전까지 남긴 곡만 1000곡이 넘는다. 그중 600곡이 가곡일 정도로 그는 ‘노래’ 그 자체를 사랑했다.
슈베르트가 1817년에 작곡한 가곡 ‘송어’는 유쾌하고 명랑한 분위기에 싱그러운 이미지를 담고 있어 초여름인 지금 듣기에 적당하다. ‘반짝이는 시냇가에서 즐겁고 변덕스럽게 움직이는 송어들은 화살처럼 빠르네’라는 첫 구절처럼 듣고 있으면 송어가 비칠 정도로 투명하고 맑은 시냇가에 푸른 풍경이 펼쳐진다. 이 곡은 피아노 5중주로도 유명한데, 피아노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등 현악기가 유려하게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가곡 ‘마왕’은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긴다. 낙엽 지는 가을과 초겨울 사이 쓸쓸하고 불안한 정취를 자아낸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아픈 아들을 태우고 한밤중에 말을 타고 달린다. 아들은 “자신과 함께 가자”는 마왕의 목소리를 듣고 두려움에 떨고,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아들은 숨이 끊어져 있다. 슈베르트는 18세 때 괴테의 동명의 시를 읽고 곧바로 곡을 붙였다. 곡 전반에 흐르는 피아노의 셋잇단음표 반주는 말발굽소리를 연상시켜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 곡을 부르는 성악가는 저음에서 고음을 넘나들며 아버지와 아들, 마왕, 그리고 작중 화자까지 1인 4역을 해낸다. 특히 전설적인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의 풍부한 표현력은 압권이란 평가다. 연가곡 ‘겨울나그네’는 총 24곡으로 구성돼 있으며 제5곡인 ‘보리수’가 널리 알려져 있다. 실연당한 주인공이 겨울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느끼는 감정을 노래했다. 슈베르트가 죽기 1년 전인 1827년에 작곡된 이 작품은 사무치는 울적함이 곡 전반에 흐른다. 테너 페터 슈라이어의 미성은 처연한 느낌과 절제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고,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의 읊조리는 듯한 무거운 음색은 곡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