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석(1938∼2022)
노오란 개나리가 팔달산 자락에 길게 이어지며 걷는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고, 경기도청에 만개한 벚꽃은 화사함을 뽐내며 상춘객의 발걸음을 이끈다. 봄의 연례행사인 꽃의 향연을 눈으로 가득 담고 코로 향기를 맡아가며 오감을 자극한다. 그런 개나리와 벚꽃을 눈에 담지 못하신 나의 아버지는 4월의 끝자락, 가족과 이별하며 한 줌 재가 돼 자연의 품으로 떠나셨다.
아버지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유품을 정리하면서 나온 나의 고등학교 성적표, 군번 줄, 대학 시절의 암기장, 사회생활 첫 신분증 사진, 큰 손주의 성적표…. 모두 붉어진 눈시울을 적시는 데 부족함이 없다. 흐릿하게나마 떠올리는 어릴 적 기억은 50㎡ 작은 집이다. 집 앞 하천에서는 미꾸라지를 잡고, 자그마한 부엌은 저녁 무렵 귀뚜라미의 놀이터가 되곤 했다.
아버지의 이른 아침 밥상에 어쩌다 올라오는 계란프라이는 5세 어린 나이의 나에겐 참기 힘든 고역이었다. 이를 모르실 리 없는 아버지는 계란 대부분을 남겨주셨다. 자전거를 타다 다친 나의 발목을 황급히 치료해주며 달콤함으로 아픔을 망각할 수 있게 연양갱을 사주셨다.
젊은 시절 고생 가득했던 이야기는 지금 배고픔 없는 삼 남매의 탄탄한 기반이 됐다. 아버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가 하던 가게 일을 도와주셨고, 주말에는 할아버지의 22마지기 농사일을 거들어 주셨다. 어머니의 분식집은 내 나이 35세까지, 농사일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였으리라. 가을 추수를 마치면 건넛방의 절반은 쌀가마니로 수북했다. 농사지을 적 어머니는 매산초등학교 앞에서 ‘코끼리문방구’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검절약으로 정신을 무장한 아버지는 전기·수도 등 낭비되는 것을 일절 허하지 않으셨다. 방수공사 등과 같은 집수리도 최근까지 유튜브를 학습 삼아 직접 하셨을 정도다. 그러나 자식, 손자, 친구분들 사이에서의 쓰임새는 넉넉함으로 다가왔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서예에 각별한 애정을 보이셨는데, 퇴직 후 하루 6시간 정도 매일 한석봉체, 왕희지체, 초서체 등 익힘에 소홀함이 없으셨다. 서예대회에 나가서 입선도 하셨는데 벽에 걸린 작품으로 본가에 갈 적마다 뵙곤 한다.
가족, 서예, 등산, 친구와의 만남 등을 일상으로 살아오셨다. 그러다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불치병이 찾아왔다. 본인도 힘드셨겠지만, 가족이 힘들어할까 삶의 끝을 놓으실 적까지 어머니와 자식들 수발에 힘을 보태주셨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으로 많이 속상해하셨다.
아버지가 떠나신 지 한 달여가 된다. 문득 어떤 일을 마주하게 될 때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매사 꼼꼼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시고 마무리하셨던 존경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나고 그리워진다. 속세를 떠나 무덤도 없이 자연으로 떠나신 분이지만 지금까지 어머니와 삼 남매의 가슴 한편에 자리한다. 살아생전 불효만 저지른 것 같아 아들로서 마음이 애달프다. 아버지 사진을 보며 이 지면을 빌려 못 했던 말을 글로 써보려 한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큰아들 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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