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서울대 내에 있는 국제백신연구소(IVI)에서 만난 조완규 상임고문이 “IVI는 우리나라에 본부를 둔 최초의 국제기구”라며 IVI 건물을 배경으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한국 생물학 아버지’평가 하루 1만보 걷기는 필수 세끼는 최대한 간단하게 “환경에 불평 말고 만족을”
글·사진 = 박현수 기자 phs2000@munhwa.com
‘한국 생물학의 아버지’, ‘한국 바이오산업의 개척자’, ‘시대의 아픔을 함께했던 참 스승’…. 조완규 국제백신연구소(IVI) 한국후원회 상임고문을 수식하는 말들은 이 밖에도 많다. 그는 서울대 총장과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현재 IVI 한국후원회 상임고문과 서울대 명예교수를 맡아 올해 95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 고문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한국 생물학의 기초를 세웠다. 포유동물의 난자 성숙과정, 한국인 유전형질 등 우리나라 발생생물학을 개척했다. 그는 1964년 미국 유학 시절 난자배양 연구를 하면서 세계 최초로 미세관 배양법을 발표해 세계 생물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무렵 발표한 논문들은 이후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토대가 됐다.
우리나라에 본부를 둔 최초의 국제기구인 국제백신연구소를 유치한 일등공신인 그는 질병 예방용 백신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연구소는 전 세계에서 콜레라, 결핵, 말라리아 등 감염성 질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살리기 위해 백신 개발을 목적으로 유엔개발계획 주도하에 2003년 설립됐다. 지금까지 이 곳에서 개발한 2000원 정도의 값싼 백신은 하루에 1만6000명이 생명을 잃고 있는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에게 큰 희망의 빛이 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20여 개 국가 70여 명의 연구원이 있다. 연구소 설립 후 20년간 정부 지원 외에 빌 게이츠 재단이 1억6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지금까지는 정보기술(IT) 사회였지만, 앞으로 인류의 생존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산업은 바로 바이오 분야입니다.”
지난 7일 서울대 내에 있는 IVI 상임고문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건강 상태를 묻자 아직까지는 좋다며 “So far so good”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롤 모델”이라고 덧붙였다. 보청기를 이용하지 않았는데도 인터뷰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혈압이 평상시 기준 150∼170으로 다소 높다. 그래서 고혈압 약과 함께 전립선비대증과 콜레스테롤 낮추는 약을 복용하는 정도로 건강한 편이다.
“노인들 건강은 장담할 수가 없어요. 민관식 전 국회부의장을 보세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테니스를 즐길 정도로 건강했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잖아요.”
비만은 건강을 해치는 나쁜 원인이라며 90세 이전까지는 체중이 63㎏이었는데 지금은 55㎏을 유지하고 있다.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첫째, 꾸준한 운동이다. “1975년 서울대 학장 시절 민방위 훈련 때 구보 도중 쓰러져 충격을 받아서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오전 5시에 일어나 10㎞씩 조깅을 17년간 한 것이 건강에 큰 도움이 됐다. 이후 주말에 관악산 등산으로 바꿨다. 서울대 총장 시절 공관에서 가까운 관악산을 즐겨 찾았다. 그러나 오래 하진 않았다. “나이가 들면 무릎 때문에 등산이 해로울 수 있어요. 특히 관악산처럼 바위가 많은 산에서는 더욱 그렇죠”
그래서 지금은 걷기와 근력운동으로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그의 일과는 오후 9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어 오전 4시에 기상하는데 맛있는 숙면을 취한다. 일어나면 PC로 업무를 본 후 오전 6시부터 산책에 나선다. 2003년 서울 방배동 서리풀공원 인근으로 이사한 후엔 이곳에서 매일 1시간 30분 정도 산책한다. 공원에 있는 운동기구를 이용해 근력도 다진다. “서리풀공원만 가면 기분이 상쾌해 지고 기운이 펄펄 난다”며 미소를 지었다. 하루 평균 1만 보 걷는 것은 필수. “나이 들수록 걷는 운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신 천천히 걸으라고 했다. 빨리 걸으면 근력운동은 되는데 체중이 줄지 않고, 천천히 걸어야 살이 빠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둘째, 소식이다. 먹는 양이 일반 사람들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1962년쯤 강의와 논문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십이지장궤양을 앓았어요. 그래서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내가 내 몸을 다스려야지’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 후 과식을 하면 속이 불편한 증세가 나타났어요. 한마디로 소화능력에 문제가 생긴 거죠. 자연히 식사량이 줄게 됐는데 그게 습관이 됐고, 오히려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 것 같아요” 요즘 아침 식사는 빵 한 조각에 주스와 우유 한 잔, 점심은 우유만 한 잔, 저녁은 간단한 반찬과 편의점에서 파는 햇반 작은 거 한 개로 해결한다.
셋째,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이게 제일 어려운 일이지요. 나이가 들면 욕심이 많아질 수 있는데 마음을 비우는 것도 건강한 노년을 보내는 데 중요합니다. 욕심을 버리도록 노력해야 해요. 지금까지 내가 뭐가 돼야겠다고 해서 된 게 하나도 없어요. 모두 등 떠밀려서 한 거지요. 서울대 학장, 부총장, 총장이 된 것도, 교육부 장관이 됐을 때도 그랬어요. 장관도 안 하겠다고 했는데,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맡게 됐어요.”
그의 좌우명은 안분지족(安分知足)이다. 주어진 삶과 주변 환경에 불평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자세를 일컫는데, 현재의 형편에 맞추어 살면 몸도 마음도 편안한 상태가 된다고 설명했다.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리자 ‘화목한 가정’을 들었다. 가정이 화목해야 밖에서 하는 일들이 모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두 살 아래인 그의 부인도 건강하다고 했다.
■ 조완규 국제백신연구소(IVI) 한국후원회 상임고문이 걸어온 길
조 고문은 1928년 황해도 재령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유년시절 일제강점기에 신발이 없어 짚신을 신고 다닐 만큼 힘들게 살았다. 중학교 재학시절 친구 두 명과 자취를 하면서 고무신 장사를 하고, 신문 배달도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이처럼 고학을 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간 끝에 대전고를 나와 1948년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했다. 당시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중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으면서 생명의 신비에 매료돼 생물학을 전공한 계기가 됐다.
하지만 곤충채집으로 실험을 대신할 정도로 대학 때 연구 환경은 열악했다. 대학 3학년일 때 6.25전쟁이 터졌다. 동기생 20명이 있었는데 죽거나 북한에 끌려가서 1952년 졸업할 때는 혼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1957년 29세에 서울대 문리대 생물학과 교수가 됐다. 38세에 미국 인구협회 지원을 받아 미국 록팰러재단 펜실베니아대학 생식생물학연구소에서 2년 동안 연구를 했다. 1966년 연구를 마치고 귀국할 때 록펠러재단이 그에게 지원한 당시 1만5000달러를 서울대에 실험실을 설치하는데 전액 기부했다.
귀국 후 1980년대 초 유전공학학술협의회를 창립했고, 유전공학 육성법 제정을 통해 인력 양성, 특별 연구비 지원, 국제협력 등을 추진했다. 서울대 초대 자연과학대학장을 거쳐 1984년 제18대 서울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4년 총장 임기를 마치고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1년 제32대 교육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리고 65세 정년퇴임 이후 30년째 명예교수로 서울대 내에 연구실을 갖고 출퇴근하는 사람은 조 교수가 유일하다.
그는 생물학자로서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 과학행정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서울대 총장 시절 시위 등으로 정치활동금지법에 따라 제적된 학생 1300명을 정치활동금지법 조항을 삭제하면서 전원 복직시킨 게 가장 큰 보람이라고 했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1984년), 한국바이오산업협회 회장(1991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1993년), 초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1994년), 한국대학총장협회 회장(1994년)한국대학총장협회 이사장(2001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 한국생물과학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7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에 선정됐다.
이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1987년), 청조근정훈장(1993년),과학기술훈장 창조장(2003년), 제20회 인촌상 교육부문상(2006년)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