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버린 배│줄리언 생크턴 지음│최지수 옮김│글항아리

남극과 북극을 정복한 노르웨이 출신의 위대한 탐험가 로알 아문센은 ‘영웅’으로 기록됐지만, 아문센의 첫 남극 탐험에 함께했던 미국인 의사 프레더릭 앨버트 쿡은 ‘희대의 사기꾼’으로 전락,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됐다. 이 책은 두 사람이 함께한 남극 탐험기이자, 탐험 이후 그들의 삶을 조망한 기록이다. 또 남극점에 도달하지 못한 실패담이면서 남극의 겨울을 최초로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의 생존기이기도 하다.

책은 아문센이 쿡이 수감된 레번워스 교도소, 일명 ‘매드하우스’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남극 정복이란 공통의 목표를 공유했던 두 탐험가의 운명은 극명하게 엇갈린 상태다. 무엇이 이들의 처지를 달라지게 한 걸까. 이들이 함께했던 남극 탐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1897년 벨지카호의 극지 탐험에 관한 실화를 기반으로 한 논픽션. 책은 결과로만 남겨진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경과를 세밀하고 집요하게 추적한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당시 항해일지와 탐험대원들의 기록을 뒤진 것도 모자라 직접 남극에 다녀왔다. 원정대가 경험한 남극의 광경, 소리, 냄새를 체험하기 위해서다. 그래서인지 온통 어둠만 존재하거나 반대로 온통 하얀 빛에 둘러싸이는 남극의 서늘한 풍경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남극에서의 고립이 장기화되며 두려움과 공포로 무너지는 탐험대원들의 모습은 호러물 그 자체다.

31세의 사령관 아드리앵 드 제를라슈가 이끄는 증기선 벨지카호는 안트베르펜에서 2만 명이 넘는 인파의 환호를 받으며 남극을 향해 출발한다. 극지 탐험을 소명으로 여기며 맡은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아문센과 허튼소리를 즐기지만 신묘한 상황 대처 능력을 갖춘 쿡이 동행한다. 일부 선원의 탈주와 해고, 자살기도 등 위기가 끊이지 않는다. 최악은 배가 남극의 빙하에 갇힌 것. 선원들은 정신이상 증세에 시달리고, 영양 부족으로 괴혈병에 걸린다. 쿡은 당시 ‘우리는 지금 정신병원에 있다’고 썼다.

이때 쿡의 의사로서의 직감이 빛을 발한다. 그린란드의 이누이트족과 함께 생활한 경험이 있는 쿡은 펭귄과 물범 날고기를 선원들에게 먹였고, 괴혈병 증세는 완화된다. 아울러 쿡이 남긴 대원들에 대한 임상 연구는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심리적·생리적 피해에 대한 보고로 오늘날 우주 탐사 등에 응용되고 있다고 책은 설명한다. 저자는 이처럼 역사 속에서 사기꾼으로 남은 쿡을 재조명한다. 북극에 가려던 아문센이 방향을 돌려 최초의 남극점 정복을 하도록 이끈 것도 쿡이고, 아문센의 개썰매 전략도 사실 쿡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아문센은 남극에 쿡을 데려간 셈이었다”고.472쪽, 2만2000원.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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