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문화인류학자 로이 리처드 그린커의 ‘정상은 없다’는 자본주의·전쟁·의료화 등 세 가지 측면에서 정신질환과 장애에 대한 낙인의 역학을 탐구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지적장애·조울증·신경쇠약… 산업화뒤 非생산적이라며 차별
‘보살핌’필요한 병사들 가려내 2차 대전때 전쟁 효용 극대화
우리 주변에 ADHD 많은 건 ‘정신질환의 의료화’ 과정 탓
‘낙인’완전히 없앨수 없겠지만 남과 다르다고 선 긋지 말아야
낯선 TV 채널의 드라마가 최근 상종가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 우영우가 좌충우돌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담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각종 SNS 게시물의 호평 속에서 11.7%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호평만 있는 건 아니다. 장애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을 만든다는 비판도 제법 많다. 찬반양론의 기저에는, 결국 우리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선을 긋는 일에 그만큼 능숙하다는 사실이 깔려 있다. 정신보건을 연구하는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로이 리처드 그린커의 ‘정상은 없다’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인간 본성보다는 문화, 그중 자본주의, 전쟁, 정신질환의 의료화로 인해 강화되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미국 보스턴에서 130㎞ 떨어진 마서스비니어드섬에 일단의 영국인이 정착한 것은 1600년대 초반. “여러 세대에 걸쳐 정착민들은 그들끼리 결혼”했는데, 약 150년 후부터 서서히 “근친혼의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의 약 4분의 1이 “유전적 청각장애”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청각장애인과 부분적 청각장애인과 청인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수어를 고안해냈다. 섬 주민들은 “청각장애가 그저 인간들 간의 다름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섬을 떠났지만, 이 섬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 청인과 청인이 수어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모두가 수어를 썼기 때문에 그것은 장애가 아니었으며 낙인찍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책의 주제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자는 “낙인이 커지거나 줄어드는 이유에 관한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은 자본주의 역사에 있다”고 명토 박는다. 북미와 유럽의 낙인은 대개 “게으른 사람에 대한 근대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오명”에서 비롯되었다. 이 일에 동참한 사람들은 “의사와 정치인, 그 밖의 공중보건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심각한 지적장애나 행동장애로 일할 수 없는 이들을 포함해 자신이 경제적으로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고립시켰다. 18세기 급격한 산업사회로의 이행과 이성의 시대가 중첩되면서 “자기 성격과 경제적 생산성을 개선하고 완전하게 할 수 있는” 개인이 탄생했다. 반면 질환, 상해, 나이 때문에 정신적·신체적 장애가 있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는 개인은 보호시설행이었다.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도 자본주의에서 나왔다. 19세기 후반 일단의 의사가 “가족이 이상에서 벗어난 사람과 그 이상을 고수하는 사람을 정의하기 위해” 동성애(동성애자)와 이성애(이성애자)라는 개념을 개발했다.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할 행동이 아니었”던 동성애는, 일단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나자마자 사회 불안의 희생양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목도하는 자본주의의 폭주, 동성애에 대한 심각한 차별은 불가분의 관계인 셈이다.
신경쇠약은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도시 중산층 남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질병”이었다. 당시 의사들은 주로 하층민이 종사하는 육체노동은 뇌나 신경계에 부담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에 소속된 정신과 의사는 50명뿐이었다. 당시 육군 병사만 400만 명이 넘었다. 그럼에도 제1차 세계대전은 “정신의학적 사고의 변화를 촉진”했는데, “생물학적 정신 질환의 모델에서 심리학적인 모델에 가까워지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 결과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병사들의 “선별검사에 집착”했다. 부적합 신병, 즉 신경쇠약, 히스테리, 조울증, 조현병, 알코올 중독이 있는 사람들을 가려냄으로써 “전쟁 중과 전쟁 후에 이들을 보살피는 비용”을 들이지 않기 위함이다.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전쟁 역시 효용을 극대화해야 하는, 또 다른 전쟁이었다.
정신질환의 의료화는 익히 우리가 경험하는 바다. 예전엔 미처 몰랐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가 그토록 많은 이유는 정신질환의 의료화 때문이다. 의료화란 “계몽주의와 과학 그리고 정신, 영혼, 인격 같은 인간 경험의 비물질적인 측면을 물질화하려는 충동”에 그 기원이 있다. 의료화는 자본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투표, 납세, 노동 전쟁처럼 정치적, 경제적인 목적으로 인간의 몸을 조직하고 이용”한다. 더하여 “사회가 공정처럼 효율을 중시하는 기계적 조직”이라면 인간의 몸도 “기계적·실용적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아픈 몸을 빨리 노동력으로 복귀하도록 도와 생산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게 목적이다. 물론 정신질환 관련 시장(?)이 넓어짐에 따라 의료와 제약 등 관련 산업의 이익 또한 증대된다.
유토피아가 구현된다고 해도 낙인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자의 말마따나 “낙인을 거부하고 고발하고 약화하고 그것에 영향을 미칠”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 시작은 내가 “병을 앓거나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가혹한 도덕적 판단의 불빛을 비추고 있는 그 사람”은 아닌가 돌아보는 일이다. “지금 과제는 다른 사회의 과거로부터 배움을 얻고 문화의 창조적 힘을 이용해 낙인 자체와 낙인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줄이는 것이다.” 600쪽, 3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