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을 잘 닫고, 시즌 2를 여는 기분이에요. 저도 좀 변했고, 함께 달라진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후보에 오르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박상영(34) 소설가가 새 책 ‘믿음에 대하여’(문학동네)를 들고 돌아왔다. 후보 선정 이후 처음 내는 소설. 변했다더니, 제목부터 그렇다. 동시대성을 띤 재치 넘치는 전작들에 비하면 조금 얌전하다. 지난 21일 서울 마포구 디어라이프에서 만난 박 작가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쓰고 싶었던 마음이 반영됐다”면서도 “과거의 나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제목이다”며 웃었다.
책에 실린 연작 소설 4편은 모두 30대의 삶을 그린다. 10대 20대 때와는 또 다른 질문을 품고, 인생의 새 국면에 접어든 인물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분투하고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다. 박 작가는 “전작들을 쓸 땐 내가 ‘요즘 애들’이었지만, 지금은 기성세대 문턱에 서 있는 것 같다”며 “그러한 중간자적 입장을 많이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대표적인 게 맨 처음 수록된 ‘요즘 애들’. 잡지사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남준은 ‘요즘 애들’이란 멸칭과 쉼 없는 멸시에 울분을 터뜨리지만, 어느새 ‘요즘 애들’을 지칭하는 사람이 된다. 원망하고 묻고 따지고 싶었던 과거의 사람들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그런 자신에게 놀라는 남준을 통해 소설은 삶이 쉬지 않고 우리를 “불가해의 영역을 이해”하는 과정 속에 밀어 넣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요즘 애들’에서 ‘기성세대’로 넘어가는 30대들이 담긴 소설 ‘믿음에 대하여’를 펴낸 박상영 작가. 지난 21일 서울 마포구 디어라이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박 작가는 이번 신작이 시즌 2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박상영 사랑 3부작’의 마지막 편이라고도 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사랑에 모든 걸 거는 뜨거운 이십 대의 나날을 그리고, ‘1차원이 되고 싶어’는 그 사랑의 기원인 10대 시절로 돌아가 저릿한 첫사랑의 동요를 포착한다. “전작들이 ‘사랑밖에 난 몰라’였다면 ‘믿음에 대하여’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회와 만났을 때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한 작품이에요. 그 둘이 어떻게 교감하고 교류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예컨대 ‘보름 이후의 사랑’은 성 소수자 연인의 온전한 동거생활을 위한 제도적 장치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우리가 되는 순간’은 직업이나 가정환경, 성적 정체성의 차이가 ‘우리’의 선택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사유하게 한다. 이렇게 사회 참여적 성격을 띠는 이야기가 늘어난 것은 그의 새로운 시즌의 방향을 짐작하고, 기대하게 한다. 박 작가는 “평소 사회파 추리소설 읽는 걸 너무 좋아하고, 그런 걸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나’와 아주 가까운 이야기들을 많이 써왔는데, 이제는 아주 먼 이야기들도 쓰려고 해요. 다음 작품은 스릴러나 환상적 요소가 가미된 장르 소설을 쓰게 될지도 몰라요.”
시즌 1의 박 작가는 주로 도회적인 퀴어 소설, 동시대 삶을 빠르게 포착하고 조명한 작품들로 주목받았다. 작가로서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데에 이런 ‘대표성’이 방해가 되진 않았을까. 그는 “이만하면 그동안 훌륭한 ‘대표’였다고 생각한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부담과 두려움이 있기도 했지만 지금은 극복했다”고 털어놨다. “제 안에 ‘퀴어 소설’ 말고도 쓰고 싶은 다양한 소재와 욕구들이 잔뜩 있으니까요. 기존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여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새로운 걸 쓰기로, 쓸 수밖에 없다고 이미 마음먹고 있었어요. 이제는 작가로서 옆으로도 넓어져야 할 시기라고 생각해요.”
이번 소설에는 연작 소설만의 묘미를 살린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네 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각기 주연이 됐다가 조연이 됐다가 하며 자리를 바꾼다는 것. 첫 직장의 입사 동기, 회사에서 가장 친한 친구, 속 터놓고 지내는 직장 상하관계, 혹은 애인이자 파트너 등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인물들이 의외의 면모를 드러내고, 새로운 사건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표제작인 ‘믿음에 대하여’에 이르면 주요 인물이 모두 등장해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한다. 커튼콜과도 같은 이 소설은 책의 제목으로 쓰일 만큼 작품집의 핵심 주제를 담고 있다. 거짓말과 배신, 죽음, 전염병, 폐업 등 삶의 무정함에 맞서는 인간의 유일한 자세, 즉 우리가 투신해야 하는 유일한 단어는 ‘믿음’뿐이라고 말이다.
“믿음은 부서질 것처럼 연약하지만 때로 인간을 구원해주죠. 그러니까 믿음을 가지세요. 믿음이 부서지면 부서진 채라도 간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