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용지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하면서 ‘북플레이션’이 현실화하고 있다. 출판계는 비용 절감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책값 인상 흐름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사진은 교보문고 잠실점. 교보문고 제공
종이값 폭등으로 인한 ‘북플레이션’(book+인플레이션)이 서점가를 강타하고 있다. 인쇄용지 가격이 오르면서 신간은 물론,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도 재쇄를 찍거나 개정판을 출간하며 책값을 인상하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출판계는 표지 띠지를 없애거나, 책 분량 자체를 줄이는 등 다양한 대책을 모색하고 있지만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인한 책값 인상 흐름이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출판계는 원가 보전을 위해 책값 인상이 불가피하다면서도 북플레이션이 독자들에게 부담을 안겨 그렇지 않아도 줄어들고 있는 독서 인구수를 떨어뜨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신간부터 재쇄까지…북플레이션 현실화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종이 원료인 미국 남부산혼합활엽수펄프(SBHK)의 지난달 평균 가격은 t당 970달러로 1월 대비 44% 급증했다. 이에 따라 국내 제지업체들은 올 상반기에만 인쇄용지 가격을 두 차례 인상했다. 이 같은 가격 인상분은 자연스럽게 책값에 반영되고 있다. 한 출판사 대표는 “올해 들어 신간 가격이 체감상 5∼10% 정도 오른 것 같다”고 전했다. 출판계에선 8∼9월쯤 한 차례 더 종이값이 인상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한 북플레이션이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큰 셈이다.
신간뿐 아니다. 최근 도서출판 푸른숲은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에세이 ‘그렇다면 정상입니다’의 7판을 내놓으면서 책값을 기존 1만3000원에서 1만7000원으로 올렸다. 책값 인상은 2015년 이 책이 출간된 이후 7년 만에 처음이다. 책날개에 나오는 저자 이력과 책 소개가 바뀌긴 했지만 개정판이 아니라 내용이 같은 책의 재판 가격이 인상된 것이다. 문창운 푸른숲 마케팅팀장은 “종이값과 물류비 등 전반적인 비용 상승에 소량 인쇄로 단가까지 올라가면서 고민 끝에 4000원 인상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21세기북스 역시 정여울 작가의 ‘빈센트 나의 빈센트’ 등 일부 도서의 가격을 10∼20% 인상했다. 출판사 관계자는 “(정가 대비 원가를 뜻하는) 원가율이 30% 안팎에서 50% 수준으로 치솟아 정가를 올리지 않으면 매출 손실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개정하지 않고 가격을 인상한 건 창사 이래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개정 도서정가제는 출간 후 1년이 지나면 가격을 올리거나 내리는 ‘재정가’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내용은 그대로인데 가격만 올랐다’는 소비자 반발을 의식해 새로 개정판을 내놓으면서 가격을 인상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RHK는 ‘화폐전쟁’(쑹훙빙), ‘비이성적 과열’(로버트 쉴러), ‘나 자신과의 대화’(넬슨 만델라) 등 20여 권을 개정판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디자인과 내용을 보강하면서 가격을 함께 올리는 일종의 ‘고육책’이다.
◇“300쪽 미만으로 써달라” 비용 절감 고육책도
종이값 상승에 일부 출판사들은 정가를 올리는 대신 제작비를 낮추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웬만한 책은 중쇄를 찍을 때 띠지를 없애고 컬러 사진을 줄이는 것은 물론, UV 코팅 등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하기 위한 ‘후가공’을 최소화하는 식이다. 북플레이션은 출판계 트렌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최근엔 출판사들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 아예 저자들에게 원고량을 줄여 300쪽 미만으로 써달라고 부탁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종이값이 예전 수준을 회복하지 않으면 최근 몇 년간 출판 시장을 석권한 200∼250쪽 안팎의 ‘가벼운 에세이’가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한편 종이값 인상으로 ‘인기 없는 구간’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한 출판사 대표는 “독자 호응이 미미한 책의 경우 가격만 올리면 오히려 손실이 더 커질 수 있다”며 “원자재 가격이 정상화되지 않으면 구간 중에서 300∼500부 정도 재쇄를 찍는 책들은 아예 절판시키는 사례가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