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 음악동네>‘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는 사람’ 있다면… 닫힌 가슴을 열어라
문화일보
입력 2022-08-01 09:18
수정 2022-08-01 09:2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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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희 ‘애모’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정지용 ‘향수’)이 있다면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엔 서촌이 있다. 7월의 마지막 화요일(7.26) 저녁 이 마을은 글자 그대로 음악동네가 됐다. 규모로 보면 작은 음악회였지만 출연자 면면을 보면 열린 음악회였다.
노래가 울려 퍼진 길담서원은 20평 남짓의 북 카페다. 그날의 주인공은 37년 동안 라디오 PD로 일하다 퇴직한 조정선. 포스터엔 자신을 통인동 신인버스커라고 발랄하게 소개했다. 사전에는 노래 부르는 게 직업인 사람을 가수라 규정하지만 동네마다 직장마다 교실마다 가수 한두 명은 있는 게 대한민국이다. 나는 그를 생활음악인이라고 부른다. 가수는 아니지만 삶 속에 멜로디가 스며든 사람이다. ‘지루한 날들이 넌 지겹지 않니/ 평범한 생활에 넌 묻혀버렸니/ 이제 그만 깨어나/ 넌 나의 슈퍼스타’(소녀시대 ‘소원을 말해봐’ 중).
‘열린 음악회’(KBS 1TV)는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두루 포용하지만 무대는 프로만 허용한다. 스포츠는 다르다. ‘세상이란 무대에선 모두 다 같은 아마추어야’(이승철 ‘아마추어’ 중). 이런 취지로 오픈 테니스는 아마추어와 프로가 모두 참가한다. 아무나 출전할 수 있지만 누구나 코트에 서는 건 아니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이래서는 곤란하다. 실사를 갖춰야 한다. 여기서 실사는 실력과 사랑을 합친 말이다. 그날 음악회는 이를테면 오픈콘서트였다. 노래 실력이 검증된 직업가수와 노래 사랑이 충만한 아마추어가 한 무대에 섰다. 그걸 가능하게 만든 건 거래가 아닌 우정이었다.
불편한 의자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관객들은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생각에 잠길 때 요즘엔 뭔가 텅 빈 것 같아’(신해철 ‘일상으로의 초대’ 중) 헤매던 중 조정선이 인도하는 음악의 오솔길로 합류한 사람들이다. 그는 어릴 적 라디오에서 수없이 들었던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팝의 세계로 이끌어준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부터 ‘누구 없소’까지 그야말로 광폭 열창했다. PD 시절 에피소드도 MSG처럼 곁들였다. 나나 무스쿠리 내한공연 때 디제이 이종환(1937∼2013)이 한국의 비주얼가수라고 지칭한 분이 있다면서 누군지 맞혀보라고 했다. 이런저런 이름들이 난무하자 기타연주로 힌트를 대신했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그런데 이럴 수가. 노래의 주인공 김수희가 서재 뒤에서 진짜로 등장한 거다. 작은 음악회에서 열린 음악회로 편성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맨 앞줄에 앉은 나는 불후의 명곡 ‘애모’를 오리지널 버전으로 차분히 흡수했다.
‘애모’를 부르고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분이 있다. 바로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이다. 이 분이 ‘열린 음악회’에 초대(1995)된 적이 있다. 당연히 노래요청이 있었고 큐시트대로 관객들과 함께 ‘등대지기’를 합창했다. 그런데 앙코르가 쇄도했다. 추기경은 무반주로 노래를 시작했는데 그 곡이 바로 ‘애모’였다. 노래방기계도 없고 프롬프터 화면도 없이 이 분은 전곡을 소화했다. ‘세월의 강 넘어 우리 사랑은 눈물 속에 흔들리는데/ 얼만큼 나 더 살아야 그대를 잊을 수 있나’. 도대체 추기경의 ‘그대’는 누구인가. 결국 해답은 본인 입에서 나왔다.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요’ 이 부분에서 가사 속의 여자, 남자를 추기경은 친구로 바꿔 부른 것이다.
친구 없는 세상이란 얼마나 허무하고 허탈하고 허망한가. ‘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작은 가슴을 열린 가슴으로 바꾸자. 그날 서촌음악회에서 나는 그걸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