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김훈 지음│문학동네

안중근 이토 저격까지 일주일
형장 이슬되기까지 여정 그려
安 의사 추동력 ‘청춘’서 찾아
“고뇌 무겁지만 처신은 가볍다”
세계관 충돌 묘사도 흥미로워
“현재의 동양정세가 더 절망적”


청년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홀연히 향했다. 동아시아 패권을 주름잡는 노회한 권력자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 위해. 권총 한 자루와 실탄 7발, 여비 100루블, 그리고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논리를 머리와 가슴에 지닌 채. 서른한 살의 안중근은 고국을 좌지우지하는 이토 통감을, 더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를 맨몸으로 대적한다.

소설가 김훈의 신작 장편소설 ‘하얼빈’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까지 일주일 그리고 검찰 조사와 법정 신문을 거쳐 형장의 이슬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다. 작가는 나라를 집어삼킨 열강의 제국주의에 홀로 맞선 안중근의 추동력을 ‘청춘’에서 찾았다.

이토를 죽이기 위해 하얼빈에 동행했던 우덕순과 안중근의 대화는 ‘청춘 미학’의 백미다. 두 젊은이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술집에서 이토 살해를 모의한다. 대의명분이나 추후 대책, 거사 자금 같은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없이, 그저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뜻이 통해 곧바로 하얼빈으로 향한다. 김훈은 이를 두고 “두 젊은이의 시대에 대한 고뇌는 무거운 것이지만, 그들의 처신은 바람처럼 가벼웠다”며 “젊은이다운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으로 가장 놀랍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안중근의 청춘에 기반한 과감한 실행력이 소설 전반부를 이끈다면, 후반부의 중심은 안중근의 말이 빚어내는 논리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자신의 ‘몸속에서 버둥거리는 말들’을 느낀다. 이 말들은 안중근이 일제강점기하에서 느꼈던 ‘몸속에서 들끓는 말들’과 궤를 같이한다. 이는 곧 안중근이 생각하는 동양평화의 길이고, 이토를 죽여야 했던 이유다. 작가는 이 ‘말들’을 당시 검찰 신문 조서와 공판 기록을 기초로 안중근의 목소리로 충실히 재현한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아시아 각국이 독립하고 자주적인 체계를 만들어야 이뤄질 수 있다는 개념이다. 이는 동아시아가 일본 패권 안에 들어와야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이토의 논리와 완전히 상반된다.

안중근의 이토 살해는 동양평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관의 충돌로 조명된다. 그리고 안중근과 이토의 행적을 교차시키는 서술 방식을 통해 거대한 세계관의 충돌은 다시 안중근 대 이토, 개인의 충돌로 환원된다. 이들은 동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교차되는 하얼빈에서 숙명적으로 만나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지금 동양의 정세는 일제강점기보다 더 절망적으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작가의 말’에서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놓을 수는 없다”고 적은 이유다.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과 반쯤은 제국주의적 세계에 속해 있던 천주교 사제들의 이중적 지위에서 빚어지는 갈등도 서사의 한 축을 담당한다. 안중근에게 세례를 베푼 빌렘 신부는 속세로 나가려는 안중근의 영혼을 걱정하지만, 안중근은 ‘이토의 땅’이 돼 버린 고국을 두고 하느님의 세계에 머물 수 없다. 거사를 끝내고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죽기 전 빌렘 신부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자 하고, 빌렘 신부는 그의 살인을 인정할 수 없지만 그의 영혼을 받아들여 고해성사를 베푼다. 빌렘 신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염려해 안중근을 ‘죄인’이라 단정한 뮈텔 주교와 대비를 이룬다.

국가적 영웅을 다뤘다는 점에서 ‘하얼빈’은 여러모로 전작 ‘칼의 노래’와 비교된다. 이순신의 내면적 고뇌에 집중하고자 1인칭으로 서술된 ‘칼의 노래’와 달리 ‘하얼빈’은 3인칭 시점으로 비교적 담백하게 서술됐다. 단단하고 꼿꼿하지만 다소 평면적인 ‘하얼빈’ 속 안중근은 역사 속 이순신보다 더 이순신을 생생하게 형상화했던 작가의 내공을 생각하면 아쉽다. 스승인 이토의 죽음을 슬퍼하는 황태자 이은의 모습은 ‘살길은 슬픔에 있었던’ 당시 황실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줘 서글프다. 308쪽, 1만6000원.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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