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성신여대 정외과 교수·국제정치학

미국은 한국과 일본과 대만이 참여하는 ‘반도체 칩4 협의체’ 구성을 추진하고 있다. 이 협의체 참여는 국익에 부합된다. 문재인 정부처럼 쿼드 결성 초기부터 참여하지 않았다가 외톨이가 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칩4 협의체’는 미국·일본의 반도체 설계 및 장비 기술과 한국·대만의 생산 능력을 결합시켜 반도체 국제 분업을 극대화하고 중국의 도전에 직면한 자유 진영이 기술 우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미·중 패권경쟁은 군사와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기술 영역에서도 가열되고 있다. 군사력은 경제력과 첨단 기술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탱될 수 없다. 중국은 전후 미국 중심의 패권 질서 아래서 많은 이득을 봤으면서도 그 질서를 교란하고 훼손하는 모순된 정책을 펴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반도체 원천 기술과 장비를 이용해 첨단 무기를 만들어 미국에 군사적 도전장을 내밀고 자유주의 국제정치질서를 뒤집어엎으려고 하고 있다. 중국은 첨단 기술을 이용한 ‘디지털 전체주의’로 타락하고 있다. ‘칩4 협의체’는 반도체 기술 동맹을 넘어서 기술의 ‘자유주의적 사용’ 원칙을 확립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우크라이나전쟁 이후 글로벌 기업들의 생산과 투자 패턴은 ‘오프 쇼어링(off-shoring)’에서 정치체제가 안정된 우방국으로 이동하는 ‘프렌들리 쇼어링(friendly shoring)’으로 옮겨가고 있다. ‘칩4 협의체’는 이런 국제정치의 새로운 흐름에 부합되는 것이다. 한국과 같은 중견 국가는 국제정치의 흐름을 읽고 파도를 타듯이 그 흐름에 능동적으로 편승하면서 국익을 극대화해 나가야 한다. ‘칩4 동맹’은 첨단 기술적 차원에서 우리에게 찾아온 기회다.

중국은 한국이 ‘칩4 협의체’에 참여할 경우 중국의 거대한 반도체 시장을 잃을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다. 그런 중국의 협박은 허세일 뿐이다.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10%에도 못 미친다. 중국의 한국 반도체 의존율은 매우 높다.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통해 반도체 독립을 이룩하는 데에는 앞으로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는 잘못된 주장에 현혹돼 ‘칩4 동맹’ 참여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중국이 ‘칩4 동맹’에 참여한 한국을 제재하거나 보복할 경우 더 이상 한국은 사드(THAAD) 보복 때처럼 운동장에서 홀로 얻어맞고 있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일본·대만이 한국과 연대해 대응한다면 중국은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칩4 협의체’가 중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중국 눈치보기식의 변명은 그만하고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

미국 중심의 자유 진영이 협력을 강화하면 중국과의 상호의존성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미·소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경제와 기술 측면에서 전혀 상호의존적이지 않았다. 지난 40년간 미·중 간의 심화한 상호의존성은 예외적인 것일 뿐이다. 미·중 패권경쟁이 심화하면서 미·중 관계는 경제와 기술 협력, 인적 교류 등 모든 측면에서 단절될 수밖에 없다. ‘칩4 협의체’의 결성은 그러한 국제정치적 흐름을 반영한 것일 뿐이다. 윤 정부는 ‘칩4 협의체’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다만, 과도기적 전환기에 한국의 기업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정부는 산업정책적 차원에서 만반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