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신정열(1933∼2018)

지난 1989년 5월 직원들과 강화 사적지를 찾은 고인(왼쪽 세 번째).  필자 제공
지난 1989년 5월 직원들과 강화 사적지를 찾은 고인(왼쪽 세 번째). 필자 제공


학처럼 단아하고, 한겨울 매화처럼 맑고 매서웠던 분. 4년 전 작고하신 고 신정열 선배님을 생각할 때면 나는 정갈하게 그려진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고는 한다. 그분을 나는 닮고 싶었다.

선배님과는 1980년 공직 초년 시절, 상사와 부하로 만났다. 부서 이동으로 같은 건물에 있던 그분을 과장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보아오던 대로 깔끔한 분이었다. 탤런트 뺨치는 준수한 외모에 늘 세련된 정장 차림이어서 짓궂은 동료들 사이에서 ‘기생오라비’로 통하던. 언제나 반듯하게 책상 앞에 앉아 나른한 오후에도 조는 모습 한번 보여주지 않았고, 그 흔한 술·담배도, 오락이나 유흥도 즐기지 않으시던 고고한 선비였다.

외모만큼이나 성품 또한 깐깐해서 칭찬할 일도, 꾸짖을 일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특히 정직하지 않거나, 부끄러움을 모르거나, 실수가 대책 없이 반복되는 등 죄질(?)이 나쁜 경우에는 서릿발같이 매섭게 질책하시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그분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온 사무실을 점령하여 다른 직원들까지 같이 꾸중을 듣는 것처럼 일손을 멈춘 채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신 자신에게 먼저 엄격한 분이었기에 그 꾸중에는 서운함보다 부끄러움과 반성이 앞섰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서움은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선배님을 생각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분만의 특별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분의 깔끔한 외모와 아주 잘 어울려서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체를 이루고 있었고, 거기에 절제된 언행과 대쪽 같은 성품이 더해져 그분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빛났던 것이다. 깔끔함과 매서움. 선배님을 떠올리기에 이보다 적절한 단어가 또 있을까!

선배님과는 2년 정도 같이 있다가 헤어졌고 다시 함께하지 못했다. 가끔 경조사 자리에서 뵙거나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분과 함께했던 추억은 은은한 향기로 남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내 안에 머물고 있다. 선배님을 다시 만난 건 내가 정년 퇴임한 후였다. 그 시절이 그립던 동료 몇 분과 함께 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선배님을 모셨다. 세월이 흘러 젊었던 우리는 어느덧 지하철 경로석에 앉을 나이가 되었고, 선배님 또한 팔십 중반의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지하철 4호선 명동역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시던 선배님의 단아한 뒷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게 마지막이었을 줄이야.

선배님의 부음은 따님이 전화로 전해주었다. 작고하신 지 일주일쯤 지난 11월 어느 날이었다. 장례를 다 치르고 알려 드리는 거라 했다. 다리에 힘이 없어 거동이 힘드셨다고, 그런 선배님을 사모님이 부축하다가 같이 넘어져 사모님까지 크게 다치셨다고, 따님이 말했다. “그 사고로 아버지는 크게 상심하셨어요. 가족에게 짐이 되면서까지 살아서 무엇하겠느냐고요. 그리고 스스로 곡기를 끊으셨어요.” 선배님은 그렇게 열흘 가까이 침대에 누워 있다 돌아가셨다 했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의식이 분명해 수발들던 딸에게 잔소리하시더라고. 왜 이제야 알려주느냐고 따님에게 서운한 감정으로 물었다.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말씀하셨어요. 폐 끼치지 말라고요. 장례 치르고 나서 가까운 분들에게만 알려 드리라고요. 세상에, 내 죽음을 바깥에 알리지 말라니…. 당신이 무슨 이순신 장군입니까?” 따님의 목소리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이 가득했다.

그 며칠 후 퇴직자 모임이 있어 선배님 소식을 전했다. 얘기를 들은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답다고. 선배님이라면 능히 그러실 분이라고….

가족에게조차 짐이 되기 싫어 선배님은 어느 날 서랍을 정리하듯 스스로 삶을 마감하셨다. 평생 본받고 싶었으나 품성이 부박(浮薄)하여 반도 따라가지 못했는데, 마지막으로 선배님은 숙제 하나를 더 남기셨다.

채내희 소설가 (전 안중근의사기념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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