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後) 공연을 돌이켜보고(look) 다음(後) 만남을 내다보자(look)는 의미의 리뷰.
공연을 놓쳐서 아쉬운 마음은 책이나 음반 같은 물질로 달래 봅니다. 혹여나 다음 공연으로 달래볼 수도 있겠죠.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1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바흐 협주곡 5번 연주를 앞두고 리허설하는 모습. 목프로덕션 제공
연주자 : 임윤찬 일시·장소 : 8월 1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프로그램 : 바흐, 피아노(키보드) 협주곡 5번 F단조 앵콜곡 : 바흐 파르티타 1번 ‘사라방드’, 브람스 피아노를 위한 발라드 2번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1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바흐 플러스’ 공연에서 바흐 협주곡 5번을 협연하고 있다. 객석에 등을 돌린 채 왼손으로 협연자에게 사인을 보내고 있다. 목프로덕션 제공
지난 1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바흐 연주는 겸손했다. 두 가지 측면의 겸손함. 우선 위대한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 대한 경외감. 임윤찬은 평소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첫 앨범으로 내놓고 싶다고 할 정도로 바흐에 대한 존경심을 표해왔다. 오죽하면 올해 밴 클라이번 콩쿠르 역대 최연소 우승을 결정지은 결선 마지막 무대에서 선택한 라흐마니노프를 ‘러시아의 바흐’라고 칭할까. 임윤찬에겐 바흐가 일종의 ‘대명사’로 자리한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오늘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겸허함. 이날 ‘바흐 플러스’ 공연은 소속사 목프로덕션의 창립 15주년을 기념하는 축제의 장이었고, 스승인 피아니스트 손민수를 포함해 많은 선배 연주자들이 함께 했다. 이날 임윤찬은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기 보다는 바흐의 본질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한 자신만의 발걸음으로 정제된 연주를 들려줬다. 그럼에도 군데군데 특유의 폭발력을 드러냈고, 이미 임윤찬을 ‘영접’했을 때부터 환호할 준비를 했던 관객들은 경탄했다.
이날 2부 두 번째 순서였던 임윤찬이 등장하자 객석에선 환호성이 터졌고, 1층 객석 일부 관객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도 했다. 연주 시작 전부터 기립박수를 받은 머쓱한 상황이지만, 임윤찬은 진중함과 쭈뼛거림 사이 어딘가에 있는 특유의 표정을 지은 채 손수 들고 온 민트색 악보를 펼치고 피아노 건반 앞에 앉았다. 이날 협연한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과 마주 보고, 객석엔 등을 돌린 채. 1층 객석에서 임윤찬의 연주를 거의 ‘1열 관람’한다고 신나 했던 필자로선 당혹스러운 상황. “모든 움직임은 등에서 시작된다”며 등운동을 강조했던 과거 1달 남짓 다닌 피트니스 트레이너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렸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1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바흐 협주곡 5번 연주를 앞두고 리허설하는 모습. 목프로덕션 제공
임윤찬은 이날 바흐의 피아노(키보드) 협주곡 5번을 연주했다. 임윤찬의 바흐는 평소 필자가 알던 바흐가 아니었다. 임윤찬이 최소한 기자보단 바흐를 더 잘 알텐데, 기자가 아는 바흐가 아닌 게 무슨 상관이냐는 물음이 나올 수 있다. 배경은 다음과 같다. 보통 클래식 공연에 가기 전 해당 공연에서 연주될 곡을 들어보곤 한다. 생전 처음 듣는 곡을 공연장에서 처음 만났다간 생업에 열중해 피곤했던 몸이 순간적인 졸음을 못 이길 수 있고, 무엇보다 모르는 채 갔다간 제대로 음악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에 학습한 곡과 연주를 비교해가며, 좋다, 별로다 평가를 내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날 임윤찬의 바흐는 필자가 평소에 들었던 바흐와는 조금 달랐다. 임윤찬이 선보인 생경한 바흐는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클린이’(클래식+어린이)에겐 위기이자 과제였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1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바흐 플러스’ 공연에서 바흐 협주곡 5번을 협연하고 있다.
1악장 도입부는 특히 그랬다. 명료하다기보단 또박또박했고, 영롱하다기보단 또랑또랑했다. 무엇보다 또박또박한 한 음 한 음과 전체적인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아는 바흐라면 명료한 한 음 한 음이 차곡차곡 쌓아지며 영롱하게 울려 우주에 닿아야 하는데.
느리고 서정적인 2악장에 오면서 임윤찬은 낭만성에 기댄 영롱함을 복원하고 있었다. 아직은 확실히 닿지 않았지만, 닿고자 하는 바흐 음악에 대한 본인만의 지향점을 향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느껴졌다.
마지막 3악장에 접어들며 콩쿠르에서 보여줬던 특유의 역동성이 살아났다. 속도가 빨라지며 음이 뭉개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음악이란 파도의 일부로 느껴졌다. 다만 전반적으론 콩쿠르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이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처럼 과감하고 담대하게 들려준다기보단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바흐의 세계에 접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1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바흐 플러스’ 공연에서 바흐 협주곡 5번을 협연하고 있다. 목프로덕션 제공
임윤찬은 이날 2곡을 앙코르로 들려줬다. 특히 두 번째로 들려준 브람스의 발라드 2번이 인상적이었다. 브람스 발라드 4곡 중 가장 소녀풍의 우아한 몽상이 느껴지는 곡이라지만, 슈베르트나 쇼팽과 비교하면 묵직하고 중후한 인상을 풍긴다. 임윤찬은 서정성과 박력을 오가는 이 작품에서 특유의 폭발력 있는 연주를 보여주며 관객들을 들썩이게 했다. 밴 클라이번 콩쿠르를 통해 임윤찬의 진면모를 알게 된 수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던 파괴력 있는 연주였을 것. 18살 소년만의 패기와 열정이 담긴 ‘소년미’ 넘치는 브람스였다.
임윤찬의 연주는 솔직했다.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그대로를 들려주는 것. 말은 쉽지만 보통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이상으로 보이고 싶을 텐데. ‘애어른’ 임윤찬은 그런 게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음악적 열망은 숨기지 않는다. 이날 공연에서도 자신이 동경하는 바흐의 음악에 도달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임윤찬은 콩쿠르 직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도 “콩쿠르 기간이 매일 새로운 발견의 연속이었다”며 그럴 때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했던 연주자다. 임윤찬이 발견하고, 완성할 바흐가 궁금해진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1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바흐 플러스’ 공연에서 바흐 협주곡 5번을 연주를 마치고, 관객석에 인사하고 있다. 목프로덕션 제공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처럼 아직 볼 수 있는 임윤찬의 국내 공연은 남아 있다. 예매는 ‘하늘의 별따기’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임윤찬은 오는 2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지휘 겸업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지휘하는 KBS 교향악단과 멘델스존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한다. 26일엔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지휘하는 KBS 교향악단과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아트홀에서 공연한다. 이어 27일엔 현대차 정몽구 재단이 강원도 평창에서 주최하는 ‘계촌 클래식 축제’에서 윌슨 응이 지휘하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한다. 10월 5일엔 정명훈이 지휘하는 원코리아오케스트라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협연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