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중 부산 초연서 혹평 작곡가 변훈 낙담… 음악 포기 강렬한 리듬·흥겨운 선율 인기 베이스 가수 단골 레퍼토리로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크으∼)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허허허허) 명태∼라고!(음허허허허허)”
베이스 오현명(1924∼2009·사진) 선생의 목소리로 기억하는 이 작품은 낭창한 테너의 음색보다는 역시 낮고 걸쭉한 저음의 목소리에 어울리는 곡이다. 뱃노래를 연상케 하는 강렬한 리듬과 흥겨운 선율에 유난히 해학적인 가사가 재미있다. 하지만 이 곡의 진짜 백미는 연극배우의 독백처럼 눈을 질끈 감고 ‘크으∼’ 하며 입맛을 다시는 부분이나 ‘명태∼’ 하며 길게 목청을 세운 뒤 호탕하게 웃는 능청스러운 추임새에 있다.
6·25전쟁 발발 후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9월, 당시 종군기자였던 양명문(1913∼1985)은 유엔군 7군단의 연락장교였던 작곡가 변훈(1926∼2000)과 정훈감 직책의 종군예술가 김동진(1913∼2009) 두 사람에게 자신의 시 ‘명태’와 ‘낙동강’ 2편을 주며 작곡을 부탁했다. ‘명태’의 노랫말에 매료된 변훈은 곧장 작품을 완성시켰고 대구에서 공군정훈음악대원으로 근무하던 베이스 오현명을 찾아가 악보 뭉치를 던져주며 “이 곡은 당신을 위해 쓴 곡이니까 꼭 한번 불러보세요”라며 노래를 불러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1952년, 당시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부산의 한 극장에서 오현명에 의해 초연됐다. 기대와 달리 청중은 이 낯선 노래에 당혹해 했고 비평가들은 비난에 가까운 비평을 쏟아부었다. 왜냐하면 홍난파류의 서정적인 가곡에 익숙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마치 연극의 대사처럼 ‘레치타티보(recitativo·오페라에서 대사를 말하듯이 노래하는 형식)’하듯 읊조리며 만담하듯 부르는 노래가 영 생소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이 곡을 작곡한 변훈 선생은 크게 낙담해 음악가의 길을 접고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백발의 오현명 선생은 특유의 넉살스러운 무드로 꾸준히 연주를 이어갔고 마침내 ‘명태’는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가곡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뱃머리에 앉아 소주 한잔하듯, 뱃사람이 된 듯 익살스럽게 불러 젖힐 수 있는 곡이라 이후 모든 베이스 가수들의 음악회 단골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작고하신 오현명 선생은 회고록에서 “변훈의 ‘명태’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 것은 그 노래에 깃들어 있는 한국적인 익살과 한숨 섞인 자조와 재치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며 “‘명태’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냄새가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곡이다. 이 작품에서는 젊지만 전쟁의 소용돌이에 갇혀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들의 자조 섞인 신세를 명태에 비유한 한탄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