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매일 최소한 하루에 한두 번은 영화 “헤어질 결심’을 생각합니다. 극장에서 두 번 봤고, 수시로 ‘헤어질 결심 각본’을 꺼내 읽고, IPTV로 좋아하는 장면을 몇 번씩 돌려봤는데도 여전히 영화가 제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볼 때마다 새로운 게 발견되는 영화인데, 이야기가 끝난 뒤 느껴지는 감상은 언제나 같습니다. 땅속으로 꺼져버린 서래(탕웨이)를 찾든 못 찾든, 인생에 다시 없을 사랑을 영영 잃은 해준(박해일)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서래의 바람과는 달리 해준은 절대 ‘붕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박찬욱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를 쓴 정서경 작가가 말했듯, 지옥과 이승을 오가며 아내를 찾아 헤맨 오르페우스처럼 해준도 바다 곁을 영원히 맴돌겠지요.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파도에 몸을 맡긴 서래. 해준만큼 상대를 지극히 사랑했기에 해준의 잘못을 덮기 위해 내린 선택이겠으나 한편으로는 “해준 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 감행한 결단이기도 하다는 데 생각이 이르면 야속해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서래는 무심한 세월에 사랑이 희미해지는 게 두려워 죽음으로써 가장 뜨거운 순간을 봉인해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헤어질 결심’은 여자에 미쳐 수사를 망쳤고, 봉인된 사랑에 갇혀 평생을 아파할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게 서래가 원하는 대로 된 셈입니다.
박찬욱은 왜 이런 러브스토리를 만든 것일까요. 최근 나온 ‘어제의 영화. 오늘의 감독. 내일의 대화.’(진풍경)를 읽다 이해의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책은 영화 저널리스트 민용준이 영화감독 13인과 인터뷰한 기록인데, 박찬욱 감독도 인터뷰이로 등장합니다. 박찬욱은 이 대화에서 ‘올드보이’ 이후 줄곧 여성 캐릭터에 신경을 기울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올드보이’는 미도(강혜정)만 진실을 모르는 채로 끝나잖아요. 물론 그래야만 하는 이야기였지만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모두 다 알게 된 진실을 그녀만 모르는 상태로 끝을 맺어서 왠지 미안하더라고요. 그리고 여자만 아무것도 모르게 만든 채 끝냈다는 게 찜찜했어요. 그러니 여자 주인공의 복수극을 만들면 그런 마음이 풀릴 거 같았죠.”
국내에선 300만 넘는 관객을 불러 모으고, 칸국제영화제에선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떠들썩한 스포트라이트의 한복판에 선 와중에, 박찬욱은 지나간 작품에 취하기보다 ‘복기(復棋)’를 하고 ‘반성(反省)’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영화가 바로 여자 주인공의 복수극인 ‘친절한 금자씨’이고, 이후에도 박찬욱은 ‘올드보이’와 달리 여성이 결코 서사에서 소외되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할리우드로 날아가 찍은 ‘스토커’는 소녀의 성장기가 곧 스토리의 중심이었고, ‘아가씨’는 두 여성이 작당해 허세 가득한 사기꾼을 엿 먹이는 영화였으니까요. 그리고 ‘헤어질 결심’의 서래는, 마침내 박찬욱이 도달한 주체적 여성 캐릭터의 경지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서래는 모든 걸 뜻한 바대로 이뤘고, 해준은 내내 헛발질만 하다 모든 걸 잃은 이야기니까요.
인터뷰집을 보니 박찬욱의 ‘반성과 복기’는 꼭 캐릭터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필모그래피 전체가 “전작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뤄져 있다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 너무 건조하고 냉정한 영화였으니 화산처럼 뜨겁고 강렬한 영화가 하고 싶어 ‘올드보이’를 택했고, 오랜 기간 숙성한 ‘박쥐’는 스스로 만족할 만큼 행복한 작업이었기에 “이 상태에 안주하면 안 되겠다” 싶어 환경이 다른 외국으로 나가 ‘스토커’를 만들었다고요.
이미 한 번 격찬을 받은 작품의 틀에 머물지 않는 것. 아무리 격찬받았다 해도 그 안엔 작은 흠결이 있기 마련이니, 집요하게 그걸 찾아내 극복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박찬욱을 20년째 거장의 자리에 있게 한 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헤어질 결심’에선 또 어떤 흠결을 발견하고 찜찜해 하고 있을까요. 그게 무엇이든 우리는 또 한 번 진일보한 ‘박찬욱 월드’를 만날 수 있겠지요.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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