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의 아버지(가운데)와 그를 둘러싼 여러 명의 앨리스.  국립극단 제공
앨리스의 아버지(가운데)와 그를 둘러싼 여러 명의 앨리스. 국립극단 제공


■ ‘뉴욕 지성계 여왕’ 손택 원작… 국립극단 연극 ‘앨리스 인 베드’

평생 침대서만 지내던 주인공
남성 중심 사고 만연한 가정서
외부의 시선에 저항하며 투병
완전한 타인 만나고 자유 찾아

여배우 6인이 각각 앨리스 연기
연출 이연주 “갇힌 듯한 주인공
실제론 치열하게 자기세계 구축”


앨리스 제임스는 매일 아파 도저히 침대 밖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상상 속 앨리스는 마음속 여성 영웅들과 티파티를 열어 담론을 펼치고, 혼자 로마 곳곳을 여행한다. 이러한 앨리스를 여성 배우 6명이 연기한다. 배우들은 각 장면마다 앨리스가 되거나 앨리스와 만나고, 때로는 관객처럼 앨리스를 바라본다. 작품의 모티브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를 구멍으로 인도했던 토끼는 내레이터로 등장한다. 이상한 나라에 온 듯 몽롱한 분위기 속에 관객들이 바라봐야 하는 단 하나의 대상은 앨리스의 고통 어린 고백이다.

간호사 “안 하는 거예요.”

앨리스 “못 하는 거예요.”

국립극단의 연극 ‘앨리스 인 베드’는 침대 위 앨리스가 너무 아파 일어날 수 없다며 간호사와 실랑이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앨리스의 “할 수 없다”는 항변에 간호사, 아버지, 오빠 해리 등은 “의지의 문제”라고 잘라 말한다.

수전 손택
수전 손택

주인공 앨리스 제임스는 실존 인물이다. 미국의 부유하고 명망 있는 집안의 막내딸. 성직자인 아버지의 딸이자 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여동생. 그녀는 42세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히스테리’로 규정된 정신적 병증과 신체적 아픔을 느끼며 평생 침대 속에서 살았다. 연극은 배경을 영국 빅토리아 시대로 설정했을 뿐, 그 외 설정은 현실과 유사하다. 작가이자 예술평론가로 ‘뉴욕 지성계의 여왕’으로 불린 수전 손택은 그녀가 남긴 일기에 주목해 원작 희곡을 썼다.

앨리스를 둘러싼 인물들은 그녀를 자신들의 언어로 규정한다. ‘의지박약’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항해 앨리스는 자신의 상태를 일기로 남겼다. 질병과 장애의 고통이 담긴 자기 관찰기록이자 남성 중심적 사고로 해석·규정된 여성의 저항이 내재된 일상과 상상의 기록. 손택의 희곡을 다듬어 내놓은 이연주 연출은 30일 인터뷰에서 “앨리스는 침대란 물리적 공간에서 갇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자신을 만나고, 자기 세계를 넓히려고 애쓴다”며 “그녀는 일기에서 치열한 전투처럼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파괴하며 나름의 세상을 창조했다”고 설명했다.

‘아픈’ 앨리스에게 ‘삶의 의지가 없다’고 단정하는 태도는 극의 배경인 빅토리아 시대 사회상과 자연스럽게 결부된다. 앨리스는 남성 중심적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낙인찍힌 여성이다. 남성의 눈에 앨리스는 ‘여자지만 능력을 사용하겠다고 결심만 하면 되는 천재’(아버지), ‘안전한 토끼굴에서 엄청난 보호를 받는 소중한 토끼’(해리)다.

상상 속 티파티에서 앨리스(가운데)는 마거릿 풀러(왼쪽)에게 공감을 받길 원하지만, 충고를 듣는다.  국립극단 제공
상상 속 티파티에서 앨리스(가운데)는 마거릿 풀러(왼쪽)에게 공감을 받길 원하지만, 충고를 듣는다. 국립극단 제공

앨리스의 상상인 티파티 장면에선 또 다른 19세기 실존 인물인 평론가 마거릿 풀러, 천재 시인 에밀리 디킨슨, 발레 ‘지젤’의 미르타 등이 등장한다. 이들은 불리한 환경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 맺으며 자기 자리를 지킨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도 앨리스에게 “일어나라”고 충고한다. 이 연출은 “앨리스로선 여성들에게서도 연민과 공감보다 충고를 듣게 돼 큰 충격이었을 것”이라며 “개별적인 고통은 같은 여성이라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앨리스를 박해당한 여성의 대표자보단 개별적으로 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연극은 앨리스가 아픈 몸과 정신을 진단하는 외부의 시선에 저항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오롯이 스스로를 대면하고 그의 세계를 넓혀가는 과정이다. 연극의 마지막 앨리스는 자신의 세계와 동떨어진 젊은 도둑과 만났을 때 오히려 일어나 걸으며 침대 밖을 벗어난다.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 ‘완전한 타인’을 만났을 때 오히려 그녀는 생애 처음 자유로움을 느낀다. 극이 시작할 때 침대 위 앨리스를 짓누르는 듯 가까이 있던 또 하나의 매트리스는 극이 끝날 때쯤엔 훌쩍 공중으로 올라가 있다. 작품은 앨리스의 고통에 대한 모든 주석을 걷어내고 앨리스란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 “관객들이 앨리스 제임스라는 무대 위의 실체를 그대로 바라보길 바랍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그대로 듣고, 그가 하는 말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공연은 24일부터 9월 18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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