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 前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졸속 제정된 美 인플레감축법
글로벌 공급망 동참국 입장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모양새

한미 FTA ‘내국민 대우’ 위배
전기차용 배터리 문제도 심각
시행령 통해 문제점 시정해야


지난 수년간 미국은 경기 진작을 위해 엄청난 규모의 통화를 시중에 풀었다. 그런데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계적으로 경제활동은 위축됐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와 곡물 가격도 솟았다. 물가상승 압박으로 세계 각국이 몸살을 앓고 있는데, 미 연준(Fed)이 이자율을 올리니 우리나라는 물가 오름세에 이어 환율도 널을 뛰고 있다. 이렇듯 미국의 경제·통상 정책은 세계 각국에 영향을 미친다.

지난달 7일 미 상원을 어렵게 통과한 인플레이션감축법안(IRA)은 하원을 거쳐 조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발효(8.16)까지 초스피드로 진행됐다. 이 법은 법인세 최저세율 조정 등을 통한 세수 확보와 고령층에 대한 의료 지원 등을 담고 있어 ‘인플레감축법’이라지만, 재정투자 계획 총 4300억 달러 중 3700억 달러가 전기차(EV) 구매 시 세액공제 및 전기차용 배터리의 원산지 규제와 보조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이 법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우리 속담이었다. 우리나라는 세계화가 후퇴하고 글로벌 분업 체계가 흔들리면서 미국이 제창한 공급망 재편에 동승하겠다고 했고, 바이든 대통령의 대외정책 방향에 호응해 산업 분야에서는 테크산업의 핵심인 반도체와 친환경 신사업으로 대두한 전기차와 전기차용 배터리를 미국에서 제조하기 위해 대규모 추가 투자 계획을 속속 발표했다. 이런 최근의 양국 관계와 우리 기업들이 보여준 대미 투자 의욕에 비춰볼 때 이번 법안은 크게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먼저, 전기차 구매 시 세액을 공제해 주는 보조금 정책에서 이 법은 북미(북미자유무역협정·USMCA 협정국인 미국, 캐나다, 멕시코)에서 최종 조립돼야 한다는 요건을 내걸어 우리나라를 제외했다. 이는 한·미 양국이 FTA에서 합의한 내국민 대우 위배 소지가 다분하다. 미측은 세액공제가 소비자를 위한 것이므로 위반 소지가 없다고 하지만, 결국 소비자로 하여금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선택을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동종 상품에 대해 국가 제도를 통해 차별을 조장하고 있어, 미국이 금과옥조와도 같이 내세워 온 동등한 경쟁(Level playing field) 여건 조성에도 배치된다. 우리나라가 테슬라에 대해 동등한 보조금을 적용하고 있음에 비춰보면, 미측의 조치는 국가 간 관계의 기본 예양인 상호주의도 무시하고 있다. 한·미 FTA에는 자동차와 관련한 분쟁은 신속하게 진행하도록 별도의 분쟁 해결 장치를 두고 있으므로 필요시 활용할 수 있겠다. 이번 법안이 바이든 대통령 지지율 회복과 다가오는 중간선거를 고려한 국내 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해 서둘러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다듬어지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만큼, 양국이 분쟁으로 가기 전에 미국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는 게 마땅하다고 본다.

다음으로는, 전기차에 장착될 배터리에 대해서도 세액공제를 받기 위해서는 제조 과정에 사용된 핵심 광물과 부품에 미국 또는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로부터의 조달 비중을 정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는 전기차 핵심 부품인 배터리 공급망을 재편하겠다는 것으로, 바이든 행정부가 공급망의 구성을 국가안보 차원에서 다루겠다는 기조에 비춰볼 때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문제는, 지금 세계적으로 전기차용 배터리 제조업체의 수가 제한돼 있고, 우리 기업들을 포함해 배터리 제조사들의 중국산 소재·부품에 대한 의존도가 아주 높아서 미국이 제시한 요건을 충족시키기가 단기적으로는 매우 어렵고, 중장기적으로 공급처를 다변화하더라도 비용 상승은 각오해야 한다. 상당 부분 핵심 광물의 채굴과 제련을 중국이 석권하다시피 한 지금의 구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영토가 넓은 자원 보유국들과 파트너십이 필요하고, 이를 구축하는 데는 당연히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 간의 협력을 강화하고 그 틀 속에서 공급망 재편을 구상하는 미국이라면 서둘러 자원 보유국과 제조국 간의 파트너십이 구축되도록 제도를 설계하고 추진해 나가는 게 옳은 방향이다. 미국이 연말까지 마련하겠다는 시행령에는 이런 미비점이 보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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