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그 자체’가 됐던 여왕
전쟁터서 트럭 몰며 탄약관리
식민지배 아일랜드 방문 사과
‘본드걸’ 변신 등 개혁·탈권위
다이애나 이혼·사망에 큰 위기
왕족 성매매 스캔들·불화까지
뛰어난 포용력으로 파고 극복
“여왕이 떠나며, 역사의 순간이 멈췄다.”
지난 8일(현지시간) 서거한 영국의 최장수 재위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해 영국 공영방송 BBC는 위와 같이 평했다. 지난 70년간 영국 군주일 뿐 아니라 영연방 14개국의 ‘정신적 지주’였던 여왕은 재위 기간 끝없이 시대 변화에 맞춰 적응했고,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영연방을 이끌어왔다. 대영제국의 영화가 시들해지는 격동기 속에서 군주가 된 여왕은 군주제 철폐를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 속에서도 왕위를 지켜냈다.
◇21세에 군 자원입대하고 런던 올림픽서 ‘본드걸’ 자청… 권위를 내려놓고 ‘영국 그 자체’가 되다 = 여왕은 1926년 4월 21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왕위 계승 서열 3위였던 그는 처음부터 왕위에 오를 운명은 아니었다. 그러나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 이혼녀와 결혼하겠다며 왕위를 포기하고 왕실을 떠나고, 아버지 조지 6세가 왕위에 오르며 여왕은 ‘왕위계승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세상이 혼란스럽던 1945년, 당시 19세였던 엘리자베스는 “조국을 위해 봉사하겠다”며 영국 여자 국방군에 입대해 구호품 전달 서비스 부서에 배치, 참전했다. 군번 ‘230873’을 달고 전쟁터에서 군용 트럭을 몰고 탄약을 관리하는 공주의 모습은 ‘영국인의 자부심’이 됐다.
1947년 그리스 왕자 출신인 해군 장교 필립공과 결혼한 여왕은 21세 생일을 맞아 “영국을 섬기며 봉사하는 데에 내 평생을 바치겠다”고 선언한다. 이후 1952년 2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뒤 여왕은 ‘왕실개혁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1970년대에는 왕실 가족의 일상을 TV 다큐멘터리로 생중계하며 권위를 내려놓았다. 2011년에는 영국에 식민지배를 당한 과거사를 지녀 반영(反英) 감정이 뿌리 깊은 아일랜드를 영국 국왕으로서 처음 방문해 사과하기도 했다.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는 영화 ‘007’을 패러디한 ‘본드걸’로 깜짝 변신했다. 그렇게 대영제국의 끝자락에 선 여왕은 ‘전통의 수호자이자 왕실의 역사를 바꾸는 인물’이자 영국 그 자체로 자리매김했다. 윈스턴 처칠부터 마거릿 대처, 리즈 트러스에 이르기까지 여왕 재임 기간 15번이나 바뀐 영국 총리들마저 그에게 국정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던 것으로 전해진다.
◇포용력 있는 ‘마미’의 품격… 다이애나 왕세자빈 서거 논란으로 불붙은 왕실 폐지론을 넘다 = 여왕의 통치 시기가 마냥 평온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그는 1997년 큰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전 왕세자빈의 교통사고 사망 논란으로 ‘왕실 존폐 논란’에 시달렸다. 당시 여왕은 찰스 왕세자와의 불화 끝 1996년 이혼한 다이애나 빈의 죽음과 거리를 두고자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휴가를 보내다 역풍을 맞았다. 다이애나 빈에 대한 동정론이 들끓으며 여론이 반(反) 왕실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침묵을 지키던 여왕은 관례를 깨고 다이애나 빈의 죽음을 추모하는 특별연설을 발표했다. 당시 여왕은 “여왕으로서, 할머니로서 다이애나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어머니이자 할머니인 여왕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성난 영국 여론도 여왕이 보여준 ‘어머니이자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가라앉았다.
그 후로도 21세기를 맞은 여왕에게 끝없는 위기가 몰아쳤다. 2019년에는 여왕의 셋째 아들 앤드루 왕자가 미성년자 성매매 스캔들에 휘말렸고, 2020년에는 해리 왕자의 아내인 손자며느리 메건 마클이 왕실과의 불화 끝 탈퇴를 선언한 뒤 “영국 왕실에서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여왕이 떠나고 찰스 3세가 즉위하며 ‘신이시여, 여왕을 지키소서(God Save the Queen)’라는 영국 국가의 가사는 ‘신이시여, 왕을 지키소서(God Save the King)’로 바뀌었지만, 영국을 지탱해온 ‘여왕의 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선영 기자 sun2@munhwa.com
관련기사
주요뉴스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