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식물학자 장 즬 린든이 발행한 ‘원예 삽화집’에 수록된 다알리아 파라곤.
벨기에 식물학자 장 즬 린든이 발행한 ‘원예 삽화집’에 수록된 다알리아 파라곤.


■ 지식카페 - 박원순의 꽃의 문화사 - (19) 다알리아

아즈텍 문명서 식용·약용으로 즐겨 먹어… 펠리페2세 주치의가 16세기 유럽에 첫 소개
美선 한때 매년 최고 다알리아 선정 영화배우 이름 붙이기도… 현재 품종만 5만7000개 등록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다알리아는 풍성한 잎들 사이로 부지런히 꽃대를 올린다. 각각의 꽃대 끝에는 도토리 혹은 알밤만 한 꽃망울들이 달리는데 색을 내비치다가 이내 꽃잎들을 하나둘 펼친다. 다채로운 색깔과 모양의 꽃들은 크고 화려하기까지 하다. 다알리아 꽃의 향연은 늦가을까지 쉼 없이 이어진다. 밝고 따사로운 햇볕 속에서 꽃을 피워 내는 다알리아의 원산지는 멕시코와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처럼 이름만 들어도 뜨거운 정열이 느껴지는 중앙아메리카의 나라들이다. 원래 이 지역에 살았던 아즈텍인들은 여기저기 잡초처럼 자라는 다알리아의 덩이줄기를 먹기도 하고, 간질 등 질병 치료를 위한 약으로 쓰기도 했다. 아즈텍인들이 다알리아를 부르는 이름은 아코코틀리(Acocotli), 코콕소치틀(Cocoxochitl) 등 여러 가지였다. ‘물 지팡이’ 또는 ‘물 파이프’를 뜻하는데, 모두 속이 비어 있는 다알리아 줄기에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1804년‘커티스 보태니컬 매거진’에 수록된 다알리아 코키네아.
1804년‘커티스 보태니컬 매거진’에 수록된 다알리아 코키네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아즈텍 문명 속에 감춰져 있던 다알리아를 발견하여 처음 유럽에 소개한 사람은 스페인 펠리페 2세 왕의 주치의이자 식물학자였던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Francisco Hernandez, 1514~1587)였다. 펠리페 2세 왕은 신세계의 자연사와 고대사 연구를 위해 1570년 에르난데스를 멕시코로 파견했다. 사실 스페인 궁정이 아즈텍의 놀라운 식물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보다 20년 전쯤 멕시코 산타크루스대의 마르티누스 드 라 크루스(Martinus de la Cruz)가 집필한 ‘아즈텍의 약초(An Aztec Herbal)’(1552)라는 저술의 영향이 컸다. 1570년 멕시코로 건너간 에르난데스는 7년간 아즈텍의 의학 전통과 식물상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후 1577년 16권에 달하는 방대한 기록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여기에는 동행한 세 명의 화가들이 그린 삽화들과 함께 3000종이 넘는 식물에 대한 귀중한 정보가 담겼다. 바닐라, 옥수수, 카카오뿐 아니라 그가 직접 쿠아우나우악(Quauhnahuac)산 근처에서 발견한 바람개비처럼 생긴 다알리아 꽃에 대한 기록도 포함되었다. 이 중요한 저술은 라틴어와 스페인어 판본으로 출판되어 유럽의 식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원본 중 일부는 안타깝게도 1671년 에스코리알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18세기 말까지 유럽에 다알리아에 대한 이렇다 할 기록은 없었다. 그러던 중 1776년 멕시코로 탐사 여행을 떠난 프랑스 식물학자 티에리 드 메농빌(Nicolas-Joseph Thiery de Menonville)이 1787년 공식 보고서에서 다알리아에 대해 ‘이상하게 아름다운 꽃’이라 기록했다.

윌리엄 후커의‘파라디수스 론디넨시스’(1805)에 수록된 다알리아 삼부시폴리아.
윌리엄 후커의‘파라디수스 론디넨시스’(1805)에 수록된 다알리아 삼부시폴리아.
그 무렵인 1788년 멕시코시티 식물원 원장이었던 비센테 세르반테스(Vicente Cervantes, 1755~1829)는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식물원의 안토니오 카바닐레스(Antonio Jose Cavanilles, 1745~1804)에게 다알리아 씨앗을 보냈다. 식물분류학자였던 카바닐레스는 프랑스에서 지내다가 혁명을 피해 스페인으로 막 돌아온 터였다. 그는 멕시코에서 온 식물들을 연구하여 1791년부터 1801년에 걸쳐 ‘식물의 아이콘과 설명(Icones et Descriptiones plantarum)’이라는 책을 순차적으로 출판했는데 여기에 다알리아 피나타(D. pinnata), 다알리아 로세아(D. rosea), 다알리아 코키네아(D. coccinea)가 포함되었다. 카바닐레스는 스웨덴의 식물학자 안드레아스 달(Andreas Dahl, 1751~1789)을 기려 이 식물에 다알리아(Dahlia)라는 이름을 붙였다. 달은 친구이자 명망 높은 식물학자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 1743~1828)와 함께 현대 식물학의 시조 칼 폰 린네(Carl von Linne, 1707~1778)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38세라는 이른 나이에 죽고 말았다. 또 다른 프랑스인 식물학자 에메 봉플랑(Aime Bonpland, 1773~1858)과 독일인 자연주의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1769~1859)도 다알리아 확산에 기여했다. 그들은 1798년부터 6년 동안 카리브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등 신세계를 여행하며 6만 본이 넘는 표본들과 수많은 씨앗을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여기에 새로운 종류의 다알리아도 포함되었다. 귀국 후 1804년 훔볼트는 ‘자연의 측면(Aspects of Nature)’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봉플랑과 훔볼트는 멕시코에 있는 동안 나폴레옹의 황후 조제핀에게 새로운 종류의 다알리아 씨앗을 보냈다. 말메종에 드넓은 잔디밭과 나무숲, 신전과 연못, 시골풍 다리가 있는 낭만적인 풍경식 정원을 만들고 장미, 베고니아 등 이국적인 꽃을 좋아했던 조제핀의 다알리아 사랑은 남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오직 자신만이 다알리아를 소유하길 원했다. 결국 다알리아를 너무나 갖고 싶어 했던 폴란드 백작이 조제핀의 시녀를 매수해 다알리아 알뿌리를 몰래 빼돌렸다는 일화도 있다.

한편 영국에 다알리아를 처음 도입한 사람은 레이디 뷰트(Lady Bute)였다. 그녀는 스페인에 영국 대사로 파견된 남편을 통해 1798년 입수한 다알리아를 큐 가든의 과학자들에게 주어 재배하도록 했으나 경험 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스코틀랜드 출신 식물학자이자 양묘업자 존 프레이저(John Fraser, 1750~1811)가 1802년 파리식물원으로부터 다알리아를 입수하여 자신의 농장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1803년엔 첼시 피직 가든(Chelsea Physic Garden)에 다알리아가 꽃을 피웠고, 1804년부터는 ‘커티스 보태니컬 매거진(Curtis’s Botanical Magazine)’에도 다양한 다알리아 품종들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유럽 정치와 문학, 사교의 중심지로 유서 깊은 켄싱턴의 홀랜드 하우스에는 1806년경 백여 본의 다알리아가 정원 곳곳에 자라고 있었다. 레이디 홀랜드(Lady Holland)는 카바닐레스로부터 받은 다알리아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로부터 직접 입수한 다알리아도 재배했다.

다알리아는 종간 교잡을 통해 신품종이 아주 쉽게 만들어지는 특성이 있다. 덕분에 19세기 초부터 다양한 모양과 색깔, 크기를 지닌 품종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 육종가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1808년에는 최초로 폼폰(pompon) 타입의 완전 겹꽃 품종이 개발되었는데, 폼폰은 프랑스 선원들의 모자에 달린 동그란 방울술 모양을 뜻한다. 농업과 원예가 크게 발달했던 체코 공화국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다알리아가 널리 재배되기도 했는데, 민족주의자들은 다알리아 클럽으로 위장하여 비밀 모임을 가졌다. 체코의 민족주의 작가 보제나 넴초바(Bozena Nemcova)는 1837년 역사적인 다알리아 무도회(Dahlia Ball)에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다알리아 여왕’으로 알려졌고, 작곡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rich Smetana)는 ‘다알리아 폴카’라는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다알리아는 영국에서 1840~1850년대에 크게 붐이 일었다. 이후 잠시 주춤했던 다알리아 인기는 1870년대에 멕시코에서 네덜란드로 캑터스 타입이 도입되면서 유럽 본토에서 다시금 크게 부상했다. 그 품종의 이름은 멕시코 대통령의 이름을 딴 ‘후아레지(Juarrezii)’로, 화사한 붉은 꽃잎이 뒤로 말려 끝이 뾰족한 모양이었다. 1880년 이후엔 콜라레트(Collarette) 타입이 등장했는데, 납작한 바깥쪽 꽃잎 안쪽에 작은 고리 형태의 주름 장식 꽃잎들이 배열되어 아주 예쁜 모양이었다. 원산지인 멕시코와 같은 대륙의 이웃 나라 미국에서는 비교적 늦게 다알리아가 주목을 받았는데, 1895년에 이르러서야 다알리아 협회가 처음 설립되었다. 다알리아의 다채롭고 화려한 이미지는 20세기 초·중반 미국의 셀럽들과 연결되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는 1920년대 초부터 연례 다알리아 쇼를 개최했는데, 상을 받은 다알리아 품종에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영화배우의 이름을 붙였다. 가령 1926년 5월 20일 자 LA타임스에는 배우 겸 학자로 영화 ‘더 딥 퍼플(The Deep Purple)’의 주연을 맡기도 했던 밀턴 실스(Milton Sills)의 이름을 딴 보라색 다알리아가 소개되었다. 다알리아 육종가 조지 V 워런(George V Warren)이 개발한 신품종이었다. 1932년 LA에서 열린 13번째 다알리아 쇼에서는 영화 ‘브로드웨이 멜로디(Broadway Melody)’의 주인공 애니타 페이지(Anita Page)의 이름을 딴 다알리아가 소개되기도 했다. 꽃 지름이 30㎝에 이르는 초대형 다알리아 품종이었다. 오늘날 다알리아는 미국의 도시 시애틀과 샌프란시스코를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다.

19세기 초 ‘피에르 조제프 르두테 자연사박물관’에 수록된 다알리아 로세아.
19세기 초 ‘피에르 조제프 르두테 자연사박물관’에 수록된 다알리아 로세아.
이렇게 점점 더 새로운 품종들이 추가되어 1930년대엔 1만4000여 품종이 기록되었고, 오늘날엔 무려 5만7000여 품종이 등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개발된 수많은 다알리아 품종들의 꽃을 모양으로 구분하자면, 홑꽃, 겹꽃, 수련, 작약, 난초, 국화, 아네모네, 장식, 캑터스, 세미-캑터스, 볼, 폼폰, 콜라레트, 술장식 형태 등 대략 스무 가지 계통으로 나뉜다. 꽃 크기는 지름 5~30㎝, 식물체의 높이는 30㎝~2m 정도다. 꽃 색깔은 파란색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색이 가능하다.

다알리아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스페인에서는 이 식물의 덩이줄기가 아즈텍에서 식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에 착안하여 유럽의 새로운 먹거리 작물로 재배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을 비롯한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했고 이미 널리 보급되어 익숙해져 있던 감자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스페인에는 지금도 다알리아 수프나 튀김 등 몇 가지 레시피가 남아 있다.

다알리아의 꽃말은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가 있다. 전자는 군중 속에 눈에 띄는 우아함, 화려함이고 후자는 변덕스러움, 불안정함이다. 그래서 중요한 인생의 변화를 맞이하여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사람에게 축복과 행운을 빌며 응원해 주기에 안성맞춤인 꽃 선물이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작약 형태의 다알리아 품종  ⓒ 박원순
작약 형태의 다알리아 품종 ⓒ 박원순


■ 다알리아(Dahlia pinnata)

원산지는 중앙아메리카 지역이다. 종명인 피나타(pinnata)는 ‘새의 깃’처럼 생겼다는 뜻인데, 깃꼴 겹잎으로 된 다알리아의 잎 모양에서 비롯되었다. 덩이줄기를 형성하며 70~120㎝ 높이로 자라고 7~10월에 걸쳐 꽃이 핀다. 1963년 멕시코 나라꽃으로 지정되었다. 유기질이 풍부하며 배수성이 좋은 중성 토양에서 잘 자라며 8시간 이상 햇빛을 받는 곳이 좋다. 추운 지역에서는 늦가을에 덩이줄기를 캐어 서리 피해가 없는 곳에 보관 후 이듬해 봄에 날이 풀리면 다시 내다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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