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날인 지난 24일 저녁 부산 동래구 스테레오북스에서 장강명(앞줄 왼쪽) 작가와 최종인(가운데) 인디페이퍼 대표, 장현정(오른쪽) 호밀밭 대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믐 제공
그믐날인 지난 24일 저녁 부산 동래구 스테레오북스에서 장강명(앞줄 왼쪽) 작가와 최종인(가운데) 인디페이퍼 대표, 장현정(오른쪽) 호밀밭 대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믐 제공


■ 장강명·김혜정 부부가 만든 독서공동체 ‘그믐’

전국 ‘작은 책방’들과 연대
매달 음력 29일 대면 모임
두달만에 회원 2100명 넘어

지난 모임선 ‘부산&책’ 나눠
“독서는 영혼의 스트레칭”


부산 =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책 안 읽는 시대라는데 독서 모임은 많다. 책 핑계로 사람 사귀고, 밥 먹고, 술도 마신다. 책 얘기 하다 일 얘기, 사는 얘기 하고, 그러다 보면 인연도 생긴다. 10∼20대에서도 독서 모임은 필수다. 빨리 쉽게 입시·취업용 자기소개 몇 줄 만들 수 있다. 그렇게라도 책을 읽으니 다행이지만 갈증도 난다. 책만 보고, 제대로 읽고, 얘기 나누고 싶다.


얼마 전 그런 모임이 생겼다는 소문이 들렸다. ‘책 근본주의자’들이 그믐달 뜬 밤에만 모였다 사라진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지난 24일이었다. 음력 29일, 그러니까 그믐날. 저녁 7시 29분, 부산 동래구 한 작은 책방에 그들이 왔다. 장강명(왼쪽 사진) 소설가와 아내 김혜정(오른쪽) 대표가 이끄는 독서 공동체 ‘그믐’이다. 친목 금지, 통성명 금지, ‘ㅎㅎ’ ‘ㅋㅋ’ ‘좋아요’ 금지. 자기소개는 ‘인생 책’으로 한다. 엄격한 규칙에도 불구하고 두 달 전 공개 후 시범 서비스 중인 현재, 온라인 회원이 벌써 2100명을 넘었다. 김 대표는 “책 읽고 말하는 것에 진심인 독서인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

모임에는 20명이 신청해 15명이 참석했다. ‘노쇼’ 방지 비용도 없는데, 꽤 괜찮은 출석률이다. 회원 정보는 아이디가 전부. ‘밤하늘’ ‘닻을 올려라’ ‘산티아고 당나귀’ 등. 여기에 마스크 쓴 얼굴이 20∼30대, 혹은 40대 같다 정도로 추측할 뿐이다. 사실 책 얘기엔 그마저도 필요 없지만. “책 정보와 접근도 부익부 빈익빈이 된 것 같다.” “숨겨진 진주 같은 책을 찾고 싶다.” “‘멍 때리기’ 같은 독서 대회는 어떨까.” 진지한 속내와 맥락 있는 질문, 재치 있는 의견이 오간다. 무해한 말, 막연한 호감. 독서로 영혼의 스트레칭을 해 온 사람들만이 감각하고 공유하는 세계다.

두 번째 ‘그믐밤’이자, 부산에서는 처음 열린 모임은 특정 책이 주인공은 아니다. 부산에서 각각 15년, 7년째 책을 만들고 있는 장현정 호밀밭 대표와 최종인 인디페이퍼 대표가 ‘지역 출판’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작가와 독자를 비롯해 책을 기획·디자인·인쇄·판매하는 모두가 ‘독서 공동체’이고, 이 독서 공동체가 지역에도 단단하게 뿌리내려야 한다는 게 김 대표의 생각이다. 사회는 장 작가가 맡았다.

통성명도 없고, 술 마시는 뒤풀이도 없지만 경직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달뜬 것도 같았다. 시작 전부터 몇몇 회원은 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믐에서 ‘장맥주’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장 작가의 손에도 맥주병이 들려 있다. 진지한 독서 모임이라더니 웬 술인가 싶은데, 이 역시 또 하나의 독서 공동체를 위한 일이었다. 그믐 행사는 참가비가 없다. 그러나 회원들은 이날 무료로 장소를 내어준 책방 스테레오북스에 책과 맥주를 구매하는 일로 보답했다.

“서울에 반발심이 생겼어요.” 장 대표는 고향인 부산에서 출판을 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지식의 생산·소비도 수도권에 편중돼 있지만 글 쓰고 읽는 사람은 분명 지역에도 존재한다”며 “책 제작과 유통까지 안정화시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최 대표와 함께 올해 초 ‘부산출판문화산업협회’ 출범을 주도했다. 장 대표가 회장, 최 대표가 사무총장이다. 40군데 출판사가 의기투합했고, 올여름 작은 성과도 냈다. 출판사 7곳이 ‘비치리딩 시리즈’를 함께 펴낸 것. 휴가철 바닷가에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로 구성된 책들은 ‘부산 바다 커피’(미디어줌), ‘부산_포구를 걷다’(예린원) 등 부산의 짠 내가 담긴, 부산만의 책들이다. 차곡차곡, 100권까지 쌓아 보겠다는 의지다.

한 회원은 “서울에서 살다가 돌아왔는데 솔직히 부산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두 대표는 각자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놨다. 최 대표는 서울에서 오랫동안 편집자로 일하다, 아내의 고향인 부산에 와서 출판사를 차렸다. “출판의 형태가 달라져 지역에도 기회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인디페이퍼 말고도 그는 레드독퍼블리싱그룹의 대표도 맡고 있다. 넷플릭스 인기 애니메이션 ‘러브, 데스+로봇’의 제작에 참여한 ‘레드독컬처하우스’의 출판 부문 자회사로 웹소설 지식재산권(IP)을 확보한다. 서울에 살 이유가 없다.

장 대표는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홍대 인디 신에서 활약한 밴드 ‘앤’의 보컬이다. 함께 활동한 밴드들이 크라잉넛, 노브레인 등. “음악만 하겠다”며 패기도 부렸지만, 종종 기묘한 회귀를 겪었다. 분명 서울에서 술을 마셨는데, 아침이면 부산 집에 있는 거다. 서울역만 보이면 무궁화호를 타고 밤새 내려왔던 것. “부산만의 느릿한 풍경이 그리웠어요.” 음악이 아니면, 서울이 아니면, 뭘 해야 하나 했는데 인디 활동이 도움이 됐다. 곡 쓰고 앨범 만드는 일이 집필하고 책 만드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모임은 책의 효용을 논하며 점점 달아올랐다. 한 회원은 “가치관과 취향, 삶의 기준을 찾는 데 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장 대표는 “뭔가를 배우지 않더라도 독서는 행위 자체로 의미가 있다”면서 “기분이 안 좋을 땐 가만히 3∼4장만 읽어도 힐링이 된다”고 했다. 장 작가는 “독서는 영혼의 스트레칭”이라고 거들었고, 최 대표는 “세상에 나쁜 개 없듯, 세상에 나쁜 책 없다”고 해 웃음을 자아냈다.

모임은 ‘건배사’로 마무리됐다. “부산이니까 생선으로 하겠다”며 장 대표가 ‘가’(가까이!), ‘오’(오라!), ‘리’(리더들이여!)를 외친다. 간절함이 읽힌다. 결국 책도 사람이 만드는 거니까.

김 대표는 “일방적 강연이 아닌 소통을 지향하고 독서 생태계 속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생각”이라고 했다. 그믐은 29일 공식 오픈한다. 꾸준히 작은 출판사, 작은 책방들과 연대할 생각. 그리하여 10월 그믐밤, 이 ‘책 덕후’들이 향할 곳은 경기 수원시의 ‘구름산책’이다. ‘책들의 부엌’을 쓴 김지혜 작가가 운영하는 동네 책방이다.
박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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